Feat. 문경 낭만 라이딩
엊그제 대전에 올라왔습니다. 울산에서 브롬톤도 끌고 왔어요. 응급실 회식에 합류했습니다. 지난 토요일 당직 때 심근경색 환자랑 심정지 환자 만나 심하게 고생했던 인턴과 간호사를 따로 불러 돔과 낙지 등속을 씹으며 추가로 ‘회’식을 했어요. 소맥 잘 만드는 응급구조사가 수고해줬습니다.
유쾌하게 담소 나누고, 터미널 옆의 준코 노래방으로 건너갔어요. 8번 방에서 노래 한 곡 불렀고, 라면 한 입 호로록 즐겼고, 새벽 2시 50분경 퇴장했답니다. (동료들의 목격담에 따르면) 숙소까지 뚜벅뚜벅 잘 걸어갔대요.
오전 8시쯤 침대에서 눈을 떴습니다. 라섹 수술 하기 전에는 안경부터 찾던 손이 이젠 휴대폰부터 찾습니다. 호주머니에 지갑 있고, 충전기 있고 손가락에 반지 있고, 손목에 단주 있는데 어라? 정작 휴대폰이 안 보입니다. 침대 주변, 해우소, 부엌 등을 죄다 둘러봤는데 행방이 묘연합니다.
숙소를 빠져나와 부리나케 응급실로 갔어요. 간밤의 기억을 간직한 인턴에게 제 마지막 동선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노래방에 다시 갔지요. 오전 9시까지 문 열어두던 곳인데, 코로나 사태로 단축영업. 하여 저녁 6시에 다시 오픈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과는 노트북에 깔린 카카오톡으로 소통했고요. 따끔한 참교육을 받았습니다.
오후 6시가 넘어 노래방 문이 드디어 열렸어요. 퇴근한 수간호사가 이마트 쇼핑 후에 준코에 들러 습득물 여부를 확인해주었습니다. 아이폰이 하나 발견되었다고 하여 안도하였으나 기쁨은 잠시. 제 폰이 아니었어요. 잠시 짬을 내서 제가 직접 8번 방을 샅샅이 들쑤셨으나 소파 밑에는 깨진 소주병, 건어물 안주 포장지, 누군가의 립밤 등만 뒹굴고 있었습니다.
준코에서 숙소까지의 동선에 있는 모든 가게를 죄다 탐문했어요. 커피숍, 편의점, 식당 등에 들어가 혹시 휴대폰 줍지 않으셨냐고 여쭈었고, 원하는 답변을 그 어디서도 듣지 못했습니다. 오전에 제 폰으로 전화를 걸었을 땐 신호가 가더군요. 그러나 아무도 받질 않았습니다. 오후 2시 이후엔 전원이 아예 꺼졌고요. 그 즈음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습니다. 제 멘탈이 딱 그러했어요.
경인일庚寅日의 인사신寅巳申 형살刑殺에 제대로 묶여 갱무꼼짝(사건이 발생한 축시丑時는 경금庚金 일간인 저에겐 12운성의 묘지墓地이기도 합니다). 집단지성의 도움을 받아 휴대폰 위치 추적을 시도했습니다. 휴대폰이 꺼지기 전 마지막으로 포착된 위치는 송촌동이더군요. 누군가 폰을 주워서 송촌동으로 가지고 갔단 얘기죠. 혹시나 그가 근처 파출소에 들러 습득물 신고를 했을까 싶어 인근의 몇몇 파출소에 전화도 걸어봤습니다. 역시나 없었고요.
경찰청의 유실물 종합관리시스템, lost112에 들어가서 분실물 신고까지 마쳤습니다. 그야말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습득자의 선의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고요. 진료 와중에 종종 제 폰으로 전화 걸어보는 게 할 수 있는 ‘인사’의 전부였습니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 얘기만 50번 가까이 들었네요.
제 의식의 전원도 꺼버리고 싶었는데요. 몸은 천근만근 묵직했으나, 눈은 말똥말똥했습니다. 긴 밤 지새우고 제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날이 새면 임대폰 알아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삼킬 때, 그러니까 새벽 4시 52분경에 다시 당직실의 전화기를 쥐고 제 폰 번호를 눌렀습니다. 헤어진 애인에게 전화 걸어보는 찌질남의 심정으로.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50번 가까이 들어 이명까지 유발하던 그 여자 목소리가 이번엔 들리지 않았습니다. 전원이 꺼져 있지 않았습니다. 15초 정도 신호가 가더니 뚝! 남자가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응답합니다. “안 그래도 전화기 챙겨드릴려고 했었어요.”
이 순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1분’이었습니다. 한화 좌타자 노태형이 툭 밀어 친 타구가 유격수와 3루수 사이를 갈랐고 3루 주자 이용규가 홈을 밟았고, 한화 선수들이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도 한 듯 환호하며 그라운드로 뛰어 들어가던, 한화가 18연패의 사슬을 끊던 순간에 비견됩니다.
통화한 청년의 형님이 오토바이 타고 터미널 근처 지나다 제 폰을 주웠고, 자기에게 맡겨서 보관하고 있었답니다. 코스트코 다니는데, 6시까지 출근할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지체할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직폰을 쥐고 잠시 ER을 벗어나 후다닥 송촌동 먹자골목 공영주차장 근처로 갔습니다.
편의점 ATM에서 뽑은 사례금을 건네주니 손사래를 엄청 치더군요. 엄청 고마운 마음을 악력에 실어 약소한 현찰 쥐어주었습니다.
병원으로 후딱 돌아가려고 택시를 찾는데, 그 은인이 출근길에 절 병원까지 데려다주더군요. 자기 친구도 제 직장에서 일한다며.
하여, 아침 이슬 맞고 노숙하던 휴대폰은 26시간 만에 무사히 제 수중에 돌아왔습니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저 이제 갈 수 있습니다. 영수 PD 있는 충주로, 낭만 라이딩이 있는 문경으로(휴대폰 못 찾았으면 당직 마치자마자 울산으로, 울상으로 소환각). 서러움 모두 버리고, 알코올 모두 버리고 저 이제 갑니다.
지난 2월에 홍대에서 한일고 선배님들 만나고서 택시를 탔었는데요. 가장이 강남에 잡아준 호텔을 재끼고, 대전의 숙소까지 비몽사몽간에 내려왔더랬죠(18만 원 넘게 드니, 이용하실 분은 참고하세요).
그때도 금주를 다짐했으나, 공허한 공약이 되고 말았고요. 또 화를 자초했습니다. 10여 년 전, 응급의학과 회식 와중에 편의점 앞에서 쓰러진 저를 거두어 당직실까지 배달한 분이 지금의 가장이에요. 그때 지나가던 행인이 제 폰으로 한 연락에 응답해준 유일한 은인을 제 딸의 모친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어지간한 이벤트엔 열반한 고승처럼 초연한 가장에게 더 이상의 심려를 끼쳐선 안 될 것 같아 새삼 결심합니다. 절주니 뭐니 닥치고, 금주!
이제껏 연패를 거듭한 술과 다시는 맞짱을 뜨지 않으렵니다. 현재의 아재 심신으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네요. 달라진 모습으로 그간의 민폐를 만회하고자 합니다.
제가 즐기는 여러 술들 중에 마시는 술만 재끼는 거니까, 전처럼 많은 애용 바랍니다. 맨 정신일 때 더 유용한 아재니까요.
아제아제 바라아제, 가자 가자 저 높은 곳으로!
하루는 술을 드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보신탕이다, 이놈들아! 그러나 잘못 먹으면 사약(死藥)이니라.” 하시니라. 道典 11:403:7
‘금주’라는 목표가 올바르고 꾹 잘 참고 나아가는 과정이 올바르니, 여생은 기필코 선하고 아름다울 겁니다.
습관은 근절할 수 없다.
다만, 교체될 뿐이다.
_찰스 두히그, <습관의 힘>
참이슬 버리고, 아침 이슬 맞이합니다. 이슬 맞으며 브롬톤 라이딩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