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메커니즘]19. 인간 경험의 길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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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 : 인간 경험의 길 ③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고통에서 발견하는 삶의 의미))
(이전 글 : 인간 경험의 길 ④ 원래 삶은 쉽지 않아(인간 발전의 본질))
(이전 글 : 인간 경험의 길 ⑤ 마음의 창틀을 바꾸다(진보의 첫걸음))
최근 씁쓸한 유머를 들었다. 올해 산타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에 못 오신단다. 자가격리 14일을 한 후에 내년인 2021년 1월 8일쯤에 오신다고 한다. 이 블랙 유머처럼 코로나 19의 한 복판에서 보내는 연말은 늘어가는 확진자 수만큼이나 무거운 분위기다.
올해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 19로 인해 전 세계가 떠들썩했던 아주 시끄러운 한 해였다. 동시에 우리의 일상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해졌다. 생각해보니 올해는 그 흔한 영화관조차 한 번도 가지 않았더라. 올해는 캐럴송이 온 거리에 울려 퍼지며 온 국민이 축제를 즐기던 예전의 크리스마스는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제야의 보신각 종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됐다.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해 떠오르는 태양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할 일도 올해는 없어 보인다.
잠시 멈춤. 우리의 일상은 이렇게 강제로 고요해졌다.
감염병 확산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이 멈춰진 시간들, 이 고요한 시간들이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지긋지긋하게, 때로는 두렵게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이 지금의 시간들은 어떤 기회의 공간이기도 하다. 안팎으로 시끄러운 잡음들로 인해서 홀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찾아온 성찰의 공간 말이다. 사실 난 지금 이 공간들을 남몰래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매해 연말이 되면 으레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남들에 비해 특별히 한 일도 이룬 일도 없는데 왠지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 느낌. 바로 엊그제 2020년을 시작했는데 벌써 1년이 지났나라는 이런 아쉬운 느낌들. 막연한 아쉬움, 후회, 허전함 이런 것들.
동시에 요즘엔 어떤 감사함을 느끼기도 해서 감사한 날들이기도 하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에 하도 무의미하게 허송세월을 보낸 시간들이 많아서 후회로 가득 찬 기억들이 대부분이지만, 한편으론 그렇게 '허튼짓'을 한 시간들이 있었기에 뼈저린 후회라는 것을 통해서 격렬한 반성을 하게 되고, 그래서 아무리 소소한 작은 것일지라도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걸 보면, 허튼짓을 하고 다닌 순간들이나 그저 힘겹기만 했던 순간들이 모두 내 인생을 조립하고 있었던 아주 중요한 조각조각이었음을 시간이 흐른 뒤 뒤늦게나마 알아가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인생을 그리 쉽게 보낸 시간들은 없었던 듯한데, 특히나 정신적 신체적 감정적으로 온통 위기, 혼란, 갈등으로 가득 찬 인생의 구간이 있기도 했다. 마치 내 인생의 타임라인을 펼쳐보면 그 시간들이 블랙아웃되어 통째로 날아가버린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한마디로 말해 칠흑 같은 어둠의 시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법한 그런 힘겨운 구간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사람이 여전히 밥을 먹고 숨을 쉬며 살아지는구나, 사람이 참 죽기도 쉽지 않은 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고된 시간들을 보낸 그 당시는 모든 것들이 너무 힘겨워서 원망으로만 가득했지만, 지금은 원망으로만 가득했던 그 시간들이 오히려 감사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시간들을 견디는 동안 나에게 정신적 감정적으로 크고 작은 성장이 있었음을 그 어둠의 터널을 나오고 오랜 후에야 알게 되니 감사할 수밖에.
왠지 모를 이유로 아주 오래전부터 내 마음에 들어온 한 편의 시가 있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달이 들어가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시인은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채 내버려져 있는 대추나무에서 영글어진 대추 한 알을 보며 그 큰 대추가 저절로 재수가 좋아서 영근 것이 아니라, 태풍과 천둥과 벼락의 모진 위기를 견디고, 무서리 내리는 긴 밤과 땡볕의 뜨거운 날들과 초승 날의 싸늘함을 다 겪고서야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노래했다.
이 짤막한 노래에서 우리는 인생이 무엇인지, 세월이 과연 우리에게 주려는 것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흐르는 시간은 흐름과 함께 마땅히 자연을 영글게 하는데, 태풍과 천둥과 벼락이 나에게 불어 닥치는 그 순간만큼은 세월이 나를 영글게 하려는 그 의미는 전혀 찾지 못한 채 그것이 고통으로만, 시련으로만 느껴질 뿐이다.
비로소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보이기 시작하는 때는 태풍과 천둥과 벼락을 모두 다 맞고 그것이 다 지나간 이후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알의 영글어진 대추를 만들기 위해 비바람의 모진 시련의 시간들이 필요했듯이, 세월 또한 단단하게 영글어진 우리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사고가 필요했던 것임을, 비로소 뒤를 돌아 내가 지나온 발자국이 어떤 궤적을 남겼는지 바라보기 전까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깊은 유머가 아닐는지.
경험을 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경험이 모두 끝난 후에 자신이 경험했던 사건, 사고들을 충분히 되돌아보면서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은 뒤 다음 경험으로 넘어가서 또 다른 교훈을 얻으며 지속적으로 성장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면서 좋은 것으로만 여겨지는 빛의 터널과 힘들고 나쁜 것이라고만 여겨지는 어둠의 터널을 교차하며 계속 지나게 되는데, 만일 모진 날벼락을 맞고서도 혹은 아늑하고 풍족한 시기를 지나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그냥 지나친다면 , 우리는 배워야 할 그것을 배울 때까지 계속 날벼락을 맞거나, 혹은 그 풍족함으로 인해 오히려 나의 발목이 잡히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경험이 끝난 뒤 아무 생각 없이 다음 경험으로 첨벙 뛰어들선 안되고 하루, 월, 분기, 일 년을 지낸 후에 혹은 특별한 사건이나 상황이 종결된 후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간적, 공간적으로 충분히 물러나 홀로 있음의 시간을 갖으며 그 경험이 나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경험을 통해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성찰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루, 월, 분기, 일 년을 지낸 후에 혹은 특별한 사건이나 상황이 종결된 후에 한 알의 대추가 영글어 가듯이 우리들도 그렇게 영글어 갈 수 있게 된다. 흔히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성숙'아라 부르고, 이로부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지혜'를 얻게 되는데, 세월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일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잠시 멈춰있는 이 시간을 각 개인은 선물 같은 시간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올해 혹은 과거에 자신이 겪었던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번개 몇 개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래서 올해, 혹은 과거에 내가 걸어온 발자국은 어떤 궤적을 남겼는지 깊이 반추할 수 있는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을 갖기에 지금이 매우 적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멈춤의 시간들을 통해서 인생에서 후퇴의 시기라고 느껴지는 칠흑같이 어두운 그 순간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성장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왜냐면 우리는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요즘과 같은 멈춤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