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메커니즘]17. 인간 경험의 길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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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1월 초 이사를 앞두고 있는 난, 요즘 틈나는 대로 묵은 것을 치우고 정리하고 있다. 최근 2~3년간 사용하지 않은 것을 처분한다는 나름의 원칙을 정하긴 했지만 무언가를 버린다는 게 그리 쉽지가 않다. 그래도 과감히 버려지는 오래된 편지들, 옷가지들, 가방, 책 등을 보고 있으면 속이 너무 후련해진다.
청소하던 중 종이박스에 고이 모아둔 사원증 몇 개를 발견했다. 내 생활의 전부와도 같았던 회사생활의 기억들이 사원증 너머로 스물스물 올라왔다.
난 2000년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중간에 한 번의 퇴사 이후에 갖은 휴식기간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햇수로 18년이 조금 안 되는 직장경력이 있다. 돌이켜보니 코 끝이 괜스레 찡해온다. 아마도 나름 녹록지 않았던 순간들을 잘 견뎌온 시간들을 몸이 기억하는 듯하다.
첫 직장은 사기업이었다. 부서이동을 여러 차례 하며 같은 회사에서 11년을 근무했다. 11년을 근무하니 이 곳에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다 한 듯 느껴졌다. 무기력한 생활이 이어졌고 변화가 몹시도 간절했다. 그러던 와중에 그룹 차원에서 신규사업을 공격적으로 출범시켰다. 난 11년 동안 축적한 경력 덕분에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난 자리를 옮겨 비영리재단에서 5년을 일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렵고 힘들기 그지없었다. 기존에 이미 일하고 있던 동료들과의 관계, 사람, 시스템, 조직문화 등 어느 것 하나 편한 게 없었다. 첫 1년 동안은 내일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며 울면서 잠자리에 들 정도였으니깐. 어쨌든 난 그렇게 사기업과 비영리재단의 경험을 통합시키는 귀한 자산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16년을 일한 난 번아웃이 됐고 자발적으로 퇴사를 했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꽤나 긴 휴식기를 갖었다. (다행히도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일정한 수입 없이 버텨낼 수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사기업도 비영리재단도 아닌 정부조직에서 일하고 있다. 나름 나에게는 굉장히 큰 변화다. 이 곳 역시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익혀야 했던 첫 3개월은 눈이 빠질 정도의 극심한 두통이 빈번히 찾아왔고, 스트레스 탓에 단기간 내 흰머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전에도 그랬듯 시간이 지나면 이 어려움들이 자연스레 해결될 것임을 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16년 동안 여러 조직에서 일해온 경험이 지금 이 새로운 곳에서 일할 수 있는 튼실한 기반이 되어주고 있음도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곳에서의 고생스러운 경험 역시 훗날 어떤 식으로든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
우리는 앞을 예견할 수는 없지만 뒤를 돌아보게 되면 내가 걸어온 점 하나가 어떻게 선으로 연결되는지, 그래서 내가 걸어온 점들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故고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변화란 것은 근본적으로 불편한 일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시작은 늘 두렵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험의 중간에 빠져나오지 않고 시작한 것을 제대로 끝낼 수 있다면, 더 이상 새로운 그 시작은 계단의 밑바닥이 아니다. 아마도 이전에 이미 밟고 선 계단 이후의 어디쯤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과거의 것을 넘어 발전하고 성장한다.
휴먼 디자인은 이것을 '성숙'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성숙을 위해서는 시작한 것을 제대로 끝마쳐야 한다고 말한다. 결코 제대로 된 마무리 없이 함부로 중간에 빠져나와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인간 발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난 이것을 '인내'라고 요약하고 싶다. 인고의 시간 끝에 맛볼 수 있는 인생의 단 맛은 충분히 인고의 시간을 인내한 사람들만의 몫임을 알고 있다.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드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다. 그리고 인내가 절실하게 필요한 지금의 내게도 다시 들려주고 싶다.
'원래 삶은 쉽지 않아'
(다음 글 : 인간 경험의 길 ⑤ 마음의 창틀을 바꾸다(진보의 첫걸음))
(다음 글 : 인간 경험의 길 ⑥ 코로나 한복판에서 맞는 연말연시(멈춤을 통해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