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들이 네 살, 작은아들이 두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이 되었다.
아직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시기였음에도 현실은 집 안에서 육아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두 아이를 제대로 돌보며 잘 키우기 위해 시작된 새로운 직업의 일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어린이집 운영을 잘하기 위해서는(여기서 어린이집 운영을 잘한다는 것은 남의 아이들을 잘 키워줘야 하는 것) 원장 선생님의 아이들이 희생해야 하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어린이집 안에 엄마는 없었으며, 두 아들의 엄마는 ‘원장 선생님’이라고 불러야만 했다. 여느 학부모처럼 현장학습이나 바깥놀이에서 같은 반 친구가 할퀴고, 때려도 교사에게 “때린 아이 부모의 핸드폰 번호 주세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교실에서 장난치다가 친구에게 뺨을 연필심으로 찔렸어도 내색도 못 하였다. 병원 치료를 받았지만 지금도 갖고 있는 둘째 아이 얼굴의 흉터는 내 가슴의 응어리로 남아 있다.
학습발표회가 시작되면 동극 활동에서 단 한 번도 주인공을 시켜주지 못했고, 지나가는 행인 1, 2, 3 정도가 아들의 고정 배역이었다.
율동을 하는 코너에서는 사진에 잘 찍히지도 않는 맨 끝의 뒷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직원의 자녀는 주인공을 할 수 있었고, 율동 코너에서는 무대의 중앙을 차지하며 종횡무진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오후에는 어린이집에 남아 있지 못하고, 방과 후 교실이나 학원으로 갈 수밖에 없는 원장 선생님의 아들이었다.
도로를 걷다가 가까운 차도를 가로질러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반드시 저 멀리에 있는 횡단보도를 찾아 건너야만 했다.
그런 아들들은 엄마를 빤히 쳐다보면서 하는 말이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이라서 그런 거지?”라고 하였다.
결국 두 아들은 엄마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오래 다니지 못하고 다른 기관을 찾아 엄마가 없는 타 기관에 입학하여 다니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부터는 예약된 치과와 소아과를 혼자서 진료를 받으러 다니고, 학교에서 부모 참여 수업 등을 한다고 하면 엄마는 참여 못 하신다고 먼저 신청서에 불참으로 체크하여 담임선생님께 제출하던 아이들이었다.
마치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전쟁 같은 시간도 시냇물 흐르듯이 시간은 흘러 아이들은 잘 자라줬고, 나름대로의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였다. 늦은 결혼으로 출산도 늦어서 나이 많은 엄마와 투쟁하듯이 성장과 성숙으로 무장된 아들들이었다. 요즘은 두 녀석들 손만 잡아도 먹먹해지는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다.
이렇게 또 한 해를 보내면서 ‘삶은 버티는 것인가? 또는 견디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자유롭게 흘러간 시간은 어느 종착역에서는 반드시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나의 인생 공부의 스승은 사랑하는 두 아들이었다.
멋진 녀석들, 알로뷰!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부모 자신이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 서천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