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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새작가 Jan 11. 2024

석양빛에 저물다

해 질 무렵 왕창리를 지나서 산을 넘어가는 석양을 즐기면서 운전해 갔다.

석양을 바라보다가 온갖 시름은 석양에 묻어버리고 희망을 향해 출발하는 새해 갑진년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석양을 넘어 힘껏 날아오르는 까마귀 떼가 지나간다.

몽환적인 석양이 물드는 허공에서 그들은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계속 카메라 셔터를 눌러보는데 석양이 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찍어놓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언젠가 읽었던 김유임 할머니가 쓴 '석양 나그네'라는 시가 떠올랐다.

김유임 할머니는 늦은 나이에 방송통신 중학교에 입학하여 시를 배우기 위해 동아리 활동을 하였다.

그때 '석양 나그네'라는 시를 섰다.

 

석양나그네

       - 김유임 -

서산으로 넘어갈 때 땅거미 지고

저 멀리 산기슭 마을에 하나 둘 가로등 불이 켜지고

이 집 저 집 창문에 비친 백열등 빛이 곱다.

저녁 먹느라 숟가락 소리 밥그릇 부딪치는 소리 정겨운데

어둠이 내리는 길에 갈 곳 없는 나그네

긴 철길 따라 불빛 세워가며 무거운 발길 걷다 보니

조그만 간이역 희미한 전등불만 졸고 있다.


'석양 나그네’는 할머니가 쓴 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 하였다.

배움의 기회가 늦게 왔지만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만학도의 저력을 보여 준 시였다.

할머니가 살아온 역사가 시에 반영되어 훌륭한 시를 만들었다.

입안에서만 맴돌던 언어들이 마술사의 행위처럼 시가 되었고, 일기처럼 써내려 갔을 것이다.

시를 통해 해 질 무렵 마루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생각에 잠겨서 마치 석양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할머니를 상상해 본다.

긴 여운을 주었던 할머니의 모습은 석양에 길어진 그림자 같다.



 타들어가는 석양이 산을 넘어가면서 마치 나의 귀는 석양에 붉게 물들어 버린 것처럼

투명하게 조명이 켜졌다가 사라진다.

해넘이를 통해 어둠이 내리고,

어느 순간 자연의 빛은 사라진다.

인간사도 이런 석양이 지는 모습과 흡사할 것이다.


 늦게 먹은 점심은 위장에 안착하지 못하고 얹힌 듯 차멀미를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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