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소리를 자장가 소리로 착각하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푹 잘 잤다.
시제를 모시기 위해 기차를 타고 고향에 다녀왔다.
어제 새벽부터 24시간을 분주하게 보낸 탓에 덕분에 잠을 잘 잔 것 같다.
고향은 그냥 엄마품 같다.
아무도 없는 고향이지만 나의 유년시절 젖줄이었던 곳, 나의 꿈을 키워 준 곳이기에 늘 정겹고 안정된 곳이다.
난 그 고향집이 허물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제 후 가족들과 전주에서 헤어지기 전에 이른 저녁을 먹으면서 삼십 대 초반에 맞선을 봤던 남자, 00대 치과대를 나와 전주에서 치과병원을 운영하고 있던 치과의사 이야기가 또 나왔다.
나의 맞선 이야기는 우리 가족이 고향에서 만날 때마다 거론되는 단골 멘트였다.
그 치과 의사랑 결혼했으면 우리 막내가 지금쯤 전주에서 살고 있었을 텐데,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었느냐고 큰언니가 물었다.
"그 사람 성공해서 지금은 전주에서 유지가 됐다더라."
"그러게...., 내가 보는 눈이 없었나 봐"
"그때 그 남자랑 결혼했더라면 아마도 지금쯤 전주댁으로 살고 있었겠네"
웃으면서 넘겼지만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살아보니 인생 별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무슨 꿈이 그렇게도 장황했었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의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전주의 노을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도 많은 것들을 따졌을까?
학벌, 말투, 키, 사람의 분위기까지....
뭐든 완벽해야 한다고 믿었던 시절이었지.'
사실, 맞선을 봤던 그는 나름대로 괜찮은 사람이었다.
진지하고, 예의 바르며, 무엇보다도 유식해서 말을 아주 잘했고, 목소리도 좋았다.
전주에서 처음 만났던 날, 톨게이트까지 에스코트하면서 헤어짐을 못내 아쉬워했었다.
그 후로 그는 처음 만난 나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전화통화를 자주 했었다.
어느 날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나를 만나러 왔었다.
난 그 두 번째 만남에서 처음 본 사람처럼 그 사람이 낯이 설고, 어색해서 그만 보이콧을 해버렸던 것이다.
나는 그 사람과 전화로 통화하면서, 목소리만 듣고, 상상으로 괜찮다고 느꼈던 것 같았다.
그를 다시 마주하자 지루하게 느껴졌다.
설레지 않았고, 심장이 뛰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로 마음을 닫았던 것이다.
큰언니가 말한 것처럼, 그와 결혼했었다면 전주의 골목 어디쯤, 치과 진료가 끝난 저녁에는 전주비빔밥을 먹으며, 다정하게 일상을 나누는 부부가 되어 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지금 나의 이 삶은 없었겠지.
지금의 아이들도, 지금의 나도, 지금 내가 걸어온 수많은 선택과 실수와 고백도......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결혼은 선택이지만, 인생은 결국 그 선택 이후의 책임이더라.'였다.
그 시절엔 몰랐던 걸 지금은 조금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보다, 그 선택 이후에도 충분히 나답게 살아왔다는 것이 더 중요한 거니까.
지금도 나쁘지 않다.
다만 어쩌다가 전주에 가면, 그때 맞선을 봤던 시절이 생각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