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호-눈 좀 감아 봐
그때는 쭌이 비 온 다음날 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크리스마스 다음날이었다.
-왜 내게 연락이 없었을까. 아니 왜 우린 이렇게 썸만 타는 걸까. 용기가 없는 걸까 마음이 없는 걸까.
혼자서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를 푸는 나는 풍향계처럼 고개를 저었다 끄덕였다 했다.
쭌이 먼저 말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내가 먼저 물어볼 뻔했다. 어제 뭐 했냐는, 내 마음을 훤히 내비치는 그런 말. 다행히 쭌이 먼저 말했다.
"어제 재미있게 보냈어?"
"어, 으응.... 너는?"
"나는 어머니 기일이 크리스마스 즈음이라서.... 매년 크리스마스는 가족들하고 보내."
차라리 애써 말하지 말고 울었으면. 쭌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해서 더 마음이 아팠다. 얼마나 많은 시간의 먼지가 그 상처 위에 쌓였을까. 이제는 익숙해져 버릴 만큼 반복되었을 상처.
아이의 무릎에 남은 흉터를 쓰다듬으며 "에그, 조심 좀 하지." 하는 마음과 또 다르게, 큰 수술 뒤에 아직도 남아 있는 타인의 흉터를 보고 숨이 멎어버리는 그런 기분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감정을 담은 쭌의 말에 나는 섣부르게 대답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다행히 쭌이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슬프고...슬펐어. 그런데 가족들 모두 슬프다는 걸 아니까 슬프다고 말할 수가 없었어. 말이라는 게 참 이상해. 슬프다고 하는 순간 덜 슬퍼지는 느낌이야. 그,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슬픔이라고 고집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 우는 것도 그래. 우는 동시에 이제 세상에 없는 걸 인정하는 기분이야. 나는 꼭 5년이 걸렸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 인정하는 데에 말야."
속으로만 끄덕이며 듣는 내 대답을 확인하려 하지도 않고, 슬픈 표정을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고 쭌은 이야기했다.
"가족들이 어머니 기일,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즈음에 모여 다시 웃는 데에는 3년이 걸렸어. 너 시간이라는 게 얼마나 고마운 건지 아니? 때로는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것도 그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포기하게 될 때가 있어. 어머니를 다시 만나는 일을 가족들이 포기하기 시작한 거야. 3년째 되던 해의 웃음이 얼마나 건조했는지 모를 거야.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만큼이라도 가벼워진 게...."
"그랬구나, 나는 몰랐어. 쭌,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나는 쭌의 솔직한 얘기만큼 솔직하게 말했다. 그게 대답이 될 수도 없고 적절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이번에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몰랐어'는 그동안 너의 일을 몰랐다는 것과 동시에 나는 아직 그런 감정을 모른다는 두 가지의 의미이다. 미안하다는 건, 모르겠다. 내가 굳이 물어봐서 억지로 얘기를 시작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미안하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아직도 겨울에는 눈물이 안 나더라. 꼭 여름이 되면, 그것도 한낮에 대책없이 눈물이 쏟아질 때가 있어. 참 이상하지."
나는 가만히 쭌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런, 쭌의 자존심이 간신히 눈물을 붙들어매고 있었다.
"눈 좀 감아봐."
"어? 뭐야, 갑자기..."
스킨십을 두려워하는 나지만 하기 힘든 말을 해 준 쭌에게 용기를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쭌이 눈을 감은 뒤에 나 역시 눈을 감았다. 눈을 뜨니 내 입술이 쭌의 감은 눈 위에 있었다.
이번에는 쭌이 대답할 말을 찾는 듯했다. 내가 먼저 말을 했다, 쭌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거라고 예상하면서.
"있잖아, 슬픈 얘기를 할 때는 울어도 돼. 아니, 우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거야. 억지로 다 말하지 않아도 돼. 그냥 울고 싶을 때는 말을 하다가도 울어도 돼. 그게 많은 말보다 더 잘 말해주는 거야. 네 마음, 말하기 힘든 거니까.... 오늘 나한테 말한 거는 비밀로 할게. 대신 너도 비밀로 해야 돼. 우리 서로 비밀 지키기다."
눈물이 차오르는 쭌의 눈동자는 살얼음이 녹는 이른 봄날의 강 같았다. 반짝 하고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걸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냥 키스를 할걸.
그렇게 우리는 키스를 하지 못하고 헤어졌기 때문에 그 후회는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이렇게 다시 생각하는 걸 보면 그 후회는 어쩌면 오늘까지도 계속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배경음악: https://m.youtube.com/watch?v=xEyVBd_fwi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