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여기 '센스'라고는 없는 인간이 있다. 토니 웹스터. 불행하게도 그가 우리의 가이드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푯말을 들고서 보란 듯이 뒤통수를 치는 인물. 이야기의 서두부터 자신의 불완전한 기억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늘어놓지만 -마치 내가 심어놓고 밟아 터뜨리는 지뢰 같은 암시들- 독자는 '화자'를 너무 쉽게 믿어버린다. 그냥 이 인물의 화법이려니 하고, 노년에 이르러 젊을 시절을 회상하는데 사진처럼 또렷하게 떠오르면 그게 더 이상하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어디서 주워들은 뜬소문을 퍼다 나르는 것도 아니고 내 경험담을 얘기하는데 논문에서 인용출처를 밝히듯 신뢰도를 담보하며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항변하는 것도 가능하다.
'내 경험'이란 것이 간밤에 꾼 꿈이야기면 모르겠다. 지나온 한 시절에는 나 말고 여러 등장인물이, 같은 지구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실재 사람들이 등장한다. 베로니카를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독자는 오직 토니의 서술에 기대어 그녀를 형상화한다. 아직도 그 옛날의 감정이 넘실대는 토니의 기억과 해석만이 단서다. 아마도 그녀는 다정함이 부족하고 남자가 무슨 말을 하든 꼬투리를 잡는 까다로운 여자일 거라고 상상하게 되는 식이다. 40년 전 토니가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편지가 폭탄처럼 우리 눈앞에 떨어지기 전에 우리는 한 번쯤 토니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좋은지 의심해 봤던가? 예를 들어 토니는 베로니카의 집에 초대받았던 일화를 두고 마치 지울 수 없는 굴욕적인 사건인 양 떠들어댔지만 생각해 보라. 남자친구에게 모욕감을 안겨주기 위해 부모님에게 소개하는 여자가 있을까? 온 가족이 함께 조롱하는 타임을 가지려고?
학창 시절 기성세대를 실컷 혐오하다가 성인이 되고 나서 딱 그 수준의 부모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흔한가. 토니 얘기다. 빈정대는 말투가 꼴 보기 싫고 그놈의 "자기보존 본능"이라는 말도 신물 나지만 따져볼수록 그의 면모는 너무 평범하다. 특별히 매력적인 주인공도 아니고 훌륭한 인품도 못되지만 그렇다고 '개새끼'도 아닌 평범함. 그 정도라고 생각했기에 그가 쓴 편지, 앞에서도 언급한 그 폭탄 같은 편지를 읽은 후 우리-토니와 독자 모두-는 경악할 수밖에 없다. 이 정도로 베베 꼬인 인간이었다고? 토니는 자신의 필체를 알아보았다. 제 손으로 쓴 편지임이 틀림없는데 악담으로 가득한 내용은 오래전 뇌리에서 증발했던 모양이다. 에이드리언의 자살, 베로니카, 사라 그리고 장애를 가진 아들까지. 여기에 토니는 얼마나 책임이 있을까? 죽은 에이드리언은 물론이고 베로니카의 삶 역시 순탄치 못했을 것이다. 토니보다 불행했을 것이다. 사라의 삶도 불행했을 것이다. 철부지 20대 토니가 쓴 편지는 이 일련의 불행에 얼마나 책임이 있을까?
이쯤 되면 아까 토니가 심어놓은 지뢰를 제대로 밟았다는 생각이 든다. 치지직, 뜨거운 프라이팬이 물에 잠기면서 피어오르는 증기처럼 명료한 데라곤 없는 그의 기억을 믿었다니. 희미한 이미지 그리고 그에 대한 2차 해석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말도 토니가 한 말이지. 아 수많은 지뢰. '그러므로 토니가 죽일 놈이다.'라고 결론을 내리면 편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말했다시피 그는 너무 평범하므로.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편의대로 각색해서 기억하고 서술하는 사람은 넘치고 넘치므로. 이런, 토니와 내가 자꾸 겹친다. 그가 짜증 난다고 했던 나는 그를 위한 변명을 궁리하고 있다.
살아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뒤에 놓인 삶의 부피 역시 늘어나 하나의 보따리에 그러 담을 수 없게 된다. 한마디 한마디 신중히 기술하겠노라고 작심해 보지만 간신히 틀어놓은 보따리 틈새로 미처 '되돌려보기'를 끝내지 못한 시간들이 쏟아져 나온다. 잊힌 이름들이 둥둥 떠다닌다. 모자이크처럼 뒤엉킨 사진들은 순서가 엉망이다. 내 손에서 미끄러져나간 과거, 그 거대한 강줄기가 "세번 강의 해소"처럼 나를 덮친다. (반스는 거대한 혼란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만 아득해진다.
이 아득함 속에서도 나란 사람은 토니를 심판할 재판관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