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면 누구나 스스로에게 되물었을 그 말
학교에 있으면 선생님들, 급우들에게 눈에 띄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왜인지 모르게 삶에서 힘겨움이 느껴지는 친구들이요. ‘나는 잘 지내요’라고 말하는데 목소리나 말투, 표정에서 풍기는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죠? 이런 친구들은 담임선생님이 학교상담실에 살짝 찾아와서 한번 그 친구를 만나달라고 합니다.
접수면접 하고, 심리검사를 해요. 심리검사 결과를 보면 이 학생이 어두운 감정 속에 잠겨 산다는 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합니다. 이러면 대화의 소재를 잡을 수가 없죠. 그때 제가 잘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행복해?”라구요. 그러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정말 어색해합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사실 별로 그렇진 않아요.”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상담의 물꼬가 터집니다.
사실 약간 반칙이기도 해요. 저 질문에 누가 자신있게 “저 행복해요?”라고 대답하겠어요? 여러분이라면 그러겠어요? 지금 서점에서 이 책을 잡은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지 제가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니었나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지?’ 이건 사실 현대인들만의 고민도 아니에요. 아마 현생인류가 수 백만년 전 이 땅에 발을 디디면서 시작된 물음이었을 거에요.
기원전 6세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쯤 전이죠. 히말라야 부근의 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지리적으로 네팔과 인도의 경계에 속해 있는 곳이죠. 이 나라에는 유난히 영특하여 사랑받던 한 왕자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진리에 대해서 명상하기를 특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자는 나이가 어느 정도 먹고 왕궁 밖을 처음 나가 보게 됩니다. 그리고 충격을 받습니다. 병들어 괴로워하는 환자, 허리가 굽도록 땅을 가는 농민, 강한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 먹는 광경 등. 보통의 생명이 겪는 날것의 인생을 거리에서 처음 목격하게 된 것이죠. 항상 호화롭고 풍족한 요람 안에서 안락하게 지내느라 그 전에는 몰랐던 삶의 쓰디쓴 진실을 직면했습니다. 이 세계가 고통으로 가득 찬 곳이라는 걸 자각하게 되며 번뇌에 시달립니다.
왕과 왕비는 열심히 만류했지만 왕자는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고 맨몸으로 궁궐을 나갑니다. 그리고 이 불행을 제거할 수 있는 비밀을 찾으러 다닙니다. 당시 수행자들처럼 자지 않고 먹지 않는 고행을 하면서요. 얼마나 왕자의 심정이 절박했을지 느껴지시나요? 결국 그는 번뇌에서 벗어나는 법을 알고 ‘깨달은 자’가 됩니다. 이 분이 바로 석가모니에요. 우리는 부처님이라고 보통 부르죠.
2600년 전의 석가모니가 한 고민, 지금 우리가 당면하는 문제와 비슷하지 않나요? 행복에 관한 갈망은 이처럼 시대를 초월해 모든 인간이 부딪친 과제이죠. 처음에 제가 했던 질문에 ‘행복하다’고 대답한 분들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좋지만 더 행복해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잖아요.
독자들 중에는 “네가 뭐가 불행하니?”라는 어른들에게 핀잔을 들어보신 분도 있을 거에요. 굶주리지도, 아프지도 않고, 추위에 떨거나 통장 잔고를 걱정하지도 않지요. 전쟁을 겪었던 할아버지, 가난에 고생했던 아버지 세대는 이런 일차원적 고통을 겪기도 했죠. 이분들이 과거에 체험했던 혹독한 삶과 비교하면 우리의 불행은 작아 보이기도 하죠. 그러나 저는 행복이란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열 가지 조건이 괜찮아도 사소한 갈등이나 실패 하나만 있으면 금방 행복이 날아가 버리는 것처럼 느껴지죠. 이 때는 남들이 무얼 느꼈던 별개로 나의 주관적 세계가 괴로움으로 가득 차게 되요. 마치 손톱 밑의 가시처럼요.
그러니까 “지금 행복하세요?”라는 질문이 여러분 내면에 울림을 일으킨다면 이번 장을 주의 깊게 보세요. 심리학자들은 마음의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키우는 방법을 많이 연구했습니다. 이런 지식들을 이해하고 실천하면 우리 생활이 더 나아질 거에요. 물론 부처님처럼 되진 않겠지만요. 행복지수가 한 단계만 높아져도 그게 어디겠어요?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 한번 시작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