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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 Feb 03. 2024

취존 - 21세기 최고의 덕목은 '취향존중'입니다.

 요즘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덕후’라는 표현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지금으로부터 10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오타쿠’에서 유래한 일종의 비하발언이었다. ‘오덕’, ‘안여돼(안경을 쓰고 여드름 난 돼지)’ 등의 다양한 변주가 있었고, 낮은 사회성과 보편적이지 않은 행동으로 타인의 지탄을 받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TV 예능 프로그램에는 잔뜩 희화화된 일부 덕후들의 모습이 등장하며 덕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공고하게 했고, 그들이 무언가를 선호하고 깊이 파고들며 탐닉하는 ‘덕질’은 일반적이지 않은, 음침하고 마이너 한 행위로 인식됐다.


 그런데 10년 사이 세상이 바뀌었다. 요즘은 ‘덕질’을 하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것이 더 어렵다. 덕후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아이돌 덕후’, ‘락 덕후’, ‘야구 덕후’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취미와 관심사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그들은 자신의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각자의 덕질을 공유하고, 비슷한 덕후들과 동질감을 형성하며 활발하게 소통한다. 길을 가는 20·30대를 아무나 붙잡고 ‘요즘 누구(무엇)를 덕질하나요’라고 물어보면 아마 각양각색의 답이 돌아올 것이다. 덕후와 덕질은 더 이상 지탄받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타인의 손가락질을 받을까 우려되거나, 실제로 놀림의 대상이 되는 것이 두려워 숨어서 하던 일들이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었다. 그러자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타인의 덕질에 호기심과 관심을 갖다가 그것을 자신의 취미로 만들게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대상을 다른 이들에게도 권하는 ‘영업’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렇게 각자가 즐기는 취미의 종류가 다양해졌고, 비슷하게만 보이던 사람들에게 또 하나씩의 개성이 생겼다. 좋아하는 게 있는 사람은 대부분 아름답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 살아가며 어떤 대상에 깊이 빠져들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 세상은 아름답고 감정을 간질이는 온갖 것들로 가득하니 말이다.




 90년대 초반에 태어나 주로 2000년대의 문화적 산물을 누리며 자랐다. 모든 기기를 사용하고 또 보았지만, 삐삐보다 휴대전화가 익숙하고, 라디오보다 티브이가 더 익숙한 세대다. 눈과 입과 몸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산물에 무시로 적응했고, 새로 나오는 기술도 아직은 어색함을 느낄 새도 없이 빠르게 적응했다. 그러나 유독 귀만큼은 2000년대보다 80년대나 90년대의 것을 찾았다. 신해철과 정태춘과 이상은을 좋아한다. 산울림과 신승훈을 좋아하고, 동물원과 김광석의 노래를 즐겨 부른다. 외국으로 넓히면 크랜베리스나 프린스, 엑스재팬의 노래도 자주 찾는다.


 내가 좋아하는 20세기를 풍미한 아티스트를 나열하자면 끝이 없지만, 그중 한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찰나의 주저 없이 가수 이승환을 꼽는다. 매년 그의 공연을 열 번은 더 찾는 그의 열렬한 팬이다. 지금껏 쓴 용어를 활용한다면 ‘이승환 덕후’이고, ‘드림팩토리’라는 그의 회사 이름을 따서 ‘드팩민’이라고 자칭하는 여럿 중 하나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회사의 이름(드림팩토리=꿈공장)에서 착안해 그를 ‘공장장’이라 부르며, 그 과정에서 같은 덕후끼리 일종의 연대의식이나 단단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내게는 숭배(?)에 가까운 대상이지만, 사실 그는 내 또래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덕질 대상이기도 하다. 데뷔 35년 차의 50대 아티스트는 그 활동기간이 내가 살아온 기간을 훌쩍 넘긴다. 함께 덕질하는 다른 팬들도 이모나 부모 뻘인 경우도 많다. 그는 분명 우리 세대보다는 내 또래보다 윗세대, 그러니까 X세대나 이른 밀레니엄 세대에게 더 익숙한 아티스트다.


 재밌는 것은, 이러한 나의 덕질을 대하는 다른 이들의 반응이다. 여럿 모인 모임에서 덕내(덕후냄새) 나는 이야기를 하거나 SNS에 공연 후기 등을 올리면, 또래들의 반응과 윗세대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린다. 분명 우리 세대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고, 또 쉽게 보지 못할 만한 덕질일 텐데 내 또래들은 단지 ‘너 사실 90년대생 아니지?’하며 잠시 웃고 만다. 그런데 선배 세대는 ‘네가 이승환을 알아?’로 시작해서 ‘공연비가 얼만데’, ‘그럴 시간에 차라리 다른 일을 해라’는 식의 다양한 관심과 견해를 한참 늘어놓고는 한다. 공유하는 정서가 다르지 않고서야 세대 간에 이렇게 다른 반응이 나올 수 없다.


 앞에서 덕질이 보편적인 개념이 되었다고 말했지만, 그 보편성이 모든 세대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덕질은 상대적으로 낮은 연령층일수록 더 존중받는다. 젊은 세대가 다각화되는 갈등과 늘어나는 혐오표현들로 우려의 시선을 받기는 하지만, 선호와 취향에 있어서 만큼은 공존하기 위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취미가 다양해지고 즐길 거리가 많아진 만큼, 갈등을 피하고 각자의 모습을 인정받기(하기) 위해 암묵적인 룰이자 사회적 분위기를 구축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타인을 먼저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위협받지 않는 방법, 서로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취존’이다.




 취존이 아직 전 세대를 아우를 정도로 퍼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취존의 필수조건은 다양성이다. 선호의 선택지가 다양하지 않다면 취향이 생길 일도, 취향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할 일도 애초에 발생하지 않는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삶에 있어서의 다양성은 줄어든다. 어느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일출에 맞춰 농사일을 시작하고, 일몰에 맞춰 귀가하고 잠을 자는 것이 전부일 정도로 단조로운 삶이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시대에 개인의 취향이 활성화될 수 없었던 것은, 단순히 선택지가 결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수단이 적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오직 농업과 어업을 통한 식량 생산이 유일한 생존수단인 사회는 효율을 추구하기 위해 나와 다름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농사를 지어야 간신히 생존에 필요한 생산량을 수확하는 상황에서 누군가 풀피리의 달인이 되겠다고 대열에서 이탈한다면 주변에서 과연 그것을 용납할 수 있었을까. 일은 하지 않고 식량만 축내는 입을 막기 위해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탄압이 가해졌을 것이다.


 이는 치열하게 경제성장을 추구하던 산업화시대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추구하던 민주화시대까지 이어졌다. 육체적 생존과 정서적 생존을 위해 우리 조부모와 부모세대는 한 눈 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하고 앞을 보며 달려왔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생존의 방식도 많아졌고,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도 다른 것들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절박하지 않아도 몰입할 수 있고, 치열하지 않아도 몰두할 수 있다. 그렇게 획일화된 일상을 탈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여유가 생긴 현대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것 같지만,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부모 세대가 ‘아껴야 잘 산다’는 일념으로 취미도 없이 각박한 삶을 살며 알뜰살뜰 저축했다면, 우리 세대는 ‘아껴도 잘 살지 못한다’는 자조적인 현실 탓에 당장의 즐거움을 추구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비싸다는 뮤지컬 VIP석의 가격은 공연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15만 원에서 20만 원 사이, 뮤지컬 VIP석을 4천7백 번 갈 돈을 모아야 서울 시내에 20평대 아파트를 살 수 있다. 아무리 아등바등 살아도 획기적인 삶의 전환을 만들 수 없다면, 당연히 오늘 하루 행복한 시간을 사는데 돈을 쓰지 않을까.


 세대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기에 시각이 다르다. 긍정적인 현상이든, 안타까운 현상이든, 어쨌든 취존은 더 살기 좋아졌지만, 잘 살기는 더 어려워진 사회에 탄생한 새로운 시각이자 문화다. 물론, 그 취향이 타인이나 사회에 피해를 주거나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라는 전제조건이 선행되는 것은 필수고 말이다.




 갈등의 종류가 날이 갈수록 늘고 있다. 지역갈등, 계급갈등, 세대갈등에 이어 젠더갈등이 화두다. 그렇다고 기존의 갈등이 없어지거나 말끔히 해소된 것도 아니다. 어떤 갈등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거나 역사의 진보를 위해 필수적인 성장통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무수한 갈등에 지치는 건 어쩔 수 없다. 한국사회의 특수성인가 싶어 미국이나 일본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슬쩍 엿보아도 우리 갈등은 온건하고 평화적인 거였구나 싶을 정도로 첨예한 싸움들이 벌어지고 있다. 전 세계가 갈등의 홍수에 살고 있으니, 서둘러 방주를 구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겠다는 위기감도 든다.


 내 주변에는 다양한 덕후들이 있다. 가장 대중적인 아이돌 덕후에서 시작해서 최근의 트롯 열풍을 타고 나타난 중년의 트롯 덕후, 캠핑 문화의 활성화로 탄생한 캠핑 덕후들도 있다. 그들은 서로의 취향을 존중할 뿐 아니라 필요할 경우 돕기도 한다. 좋아하는 그룹의 공연 티켓을 구하기 위해 티켓팅(예매 사이트에서 티켓을 예매하는 행위)을 돕고 한정판 굿즈를 구할 경우 대가 없이 나누기도 한다. 단톡방이나 SNS를 통해 각자의 덕질을 뽐내고, 관심을 갖는 타인에게 호의적으로 최애를 알린다. 새로운 것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조언과 친절을 베풀기도 한다.


 나는 갈등의 홍수를 견뎌낼 수 있는 자세가 바로 취존이라고 생각한다. 취존은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세요’를 줄여 만들어진 단어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취향을 인정하는 것에 가깝다. 구태여 다른 이의 취향을 높이어 귀중하게 대하지는 않더라도, 나와 다른 상태로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갈등과 혐오가 난무하는 현대사회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은 귀중하게 대하는 것만큼 값지다. 다른 의견 때문에 날 선 발언으로 상처를 낳던 이들이 서로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각자의 삶을 아름답게 채워간다면,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들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취존 하는 덕후들의 모습을 보며 현대인도 공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그러니 여러분, 취존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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