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만남과 첫걸음 - 당신의 시간, 나의 시간

마음이 닿는 순간들1 - 연인관계

by 류겸

1-4. 당신의 시간, 나의 시간


여름의 초입, 햇살은 날이 갈수록 길어지고 있었다. 한낮의 뜨거운 공기는 저녁이 되어도 쉽게 식지 않았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선 지현은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구수한 커피 향에 안도하며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약속 시간보다 십 분이나 일찍 도착한 터였다. 책을 꺼내 펼쳤지만 마음은 활자를 따라가지 못했다. 시선은 자꾸만 출입문 쪽을 향했고, 들려오는 종소리에 그때마다 고개가 들렸다.


분침이 조금씩 움직였다. 십 분, 이십 분… 그가 오지 않았다. 지현은 커피잔을 들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미지근해진 커피의 표면에 작은 물결이 일었다 사라졌다. 창밖에서는 퇴근길 사람들이 무더운 공기를 뚫고 빠른 걸음을 옮겼다. 가로수 잎사귀는 무겁게 늘어져 바람조차 더뎠고, 지현의 마음도 그 잎사귀처럼 늘어졌다. 카페 음악도 지현의 심정을 헤아리는지 바흐의 피아노 독주곡인 〈시칠리아노〉가 잔잔하게 퍼지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나를 잊은 건 아닐까?’


짧은 기다림이 마음속에서는 불안으로 부풀어 올랐다. 작은 의심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기다림의 시간은 느리게 늘어나며, 마음을 조금씩 옥죄어 왔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허겁지겁 들어서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어깨에는 땀이 배어 있었고, 손에는 노트북 가방이 덜렁 매달려 있었다. 숨을 고르며 다가온 그는 연신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늦었어요.”


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지만, 마음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안도감과 서운함이 묘하게 뒤섞여, 복잡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얽혔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두 사람의 시계는 어긋나 있었다. 한쪽은 긴 기다림 속에서 불안을 키우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바쁨 속에서 죄책감을 안고 달려왔다.


그날의 대화는 평소와 달리 무겁게 흘렀다. 그는 평소처럼 차분히 말을 이어갔지만, 지현은 그 말이 마음속 깊이 와닿지 않았다. 대화의 리듬이 맞지 않았다. 마치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속도의 시계에 맞춰 말하고 듣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현은 발걸음을 늦추며 혼잣말을 했다.


“왜 이렇게 서운했을까? 단순히 기다려서 힘들었던 걸까?”


한참을 곱씹은 끝에 알게 되었다. 기다림 그 자체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그 시간 동안 자신이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건 아닐까’라는 불안이 마음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 두 사람은 다시 마주 앉았다. 이번에는 지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심스럽지만 솔직한 목소리였다.


“지난번에 기다리면서… 사실 좀 속상했어요. 내가 덜 소중한 것 같아서요.”


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곧 그는 고개를 들어 지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면 정말 미안해요. 사실은 그날, 계속 당신 생각을 하면서 달려왔어요. 그런데 늦는 순간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어요.”


짧지만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지현은 그의 눈빛에서 숨김없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안도감이 천천히 퍼져갔다. 사실은 혹시나 화성 남자 금성 여자 같은 관계가 되는 건 아닐까 염려스러운 마음이 살짝 들었었다. 그런데 그제야 알았다. 서로의 시간을 맞추는 일은 단순히 시계를 똑같이 맞추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시간 속에서 서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여름 저녁의 긴 빛은 창밖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생활 리듬은 여전히 다를지 몰랐다. 하지만 마음만은, 조금 더 가까운 박자에 맞춰지고 있었다. 어느새 바흐의 우수 가득한 피아노곡이 3박자의 흥겨운 쇼스타코비치 왈츠곡으로 바뀌어 있었다.


“삶의 시계는 달라도, 마음을 헤아릴 때 비로소 같은 시간을 산다.”

□ 마음 궁합 □

사람마다 다른 생활의 리듬이 있다.

누군가는 기다림 속에서 불안을 키우고,

누군가는 바쁨 속에서 미안함을 안는다.

궁합은 시간을 똑같이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얼마나 깊이 헤아리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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