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음악 감상실에서 시작된 아날로그의 시간

왕초보 클래식 공연 감상 100회 기록

by 류겸

1-2. 음악 감상실에서 시작된 아날로그의 시간

— 클래식 공연장을 찾기 이전, 음악을 만나는 또 하나의 방식


오랫동안 방치해두었던 책 원고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30년 전 사진 앨범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빛바랜 사진들을 넘기던 중, 예상치 못한 것이 한 장 끼어 있었습니다. 1980년대 음악 감상실 입장권. 그리고 대학 시절 처음으로 공연장을 찾아갔던 KBS교향악단 연주회 티켓도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 작은 종이 한 장들이 갑자기 과거의 문을 활짝 열어젖혀 주었습니다.

사진 앨범이라는 것은 참 신기합니다. 이사를 할 때도 절대 버리지 않는 몇 안 되는 물건, 마치 오래전 감정과 기억을 통째로 보존하는 일종의 ‘타임캡슐’과 같습니다. 클래식 음악 감상실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국 곳곳에는 클래식 전용 감상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카페와도, 공연장과도 다른, 아날로그적 감상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클래식 음악 감상실은 보통 어둑한 조명 아래 커다란 스피커가 정면에 자리하고 한쪽에는 LP판이 빼곡히 꽂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조용히 커피를 내리던 작은 바(Bar)가 존재하는 그런 풍경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음악에 깊이 빠져있다가 잠시 졸기도 하고, 지루해지면 전용 감상공간 밖에 있던 휴게실로 나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여유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당시 클래식 전문 공연이 많지 않던 시대에, 음악 감상실은 청춘에게 음악과 휴식, 그리고 문화적 호기심을 동시에 제공하던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부산에서 자란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광복동의 ‘필하모니’ 감상실이었습니다.


부산필하모니.png 〈부산 필하모니 음악 감상실 (출처: 부산일보)〉
부산 필하모니 음악 감상실에는 당시 우리나라에 3대 밖에 없다는 영국제 오리지널 Tannoy Autograph 스피커가 있었고, 미국제 PA용 BGW 202 프리앰프와 Crown DC-300a 파워앰프가 감상 좌석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CD 플레이어가 없던 시절이라 일본제Nakamichi RX-202 카세트데크와 Yamaha PF-800 턴테이블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새로 단장된 메인 상가 거리에서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눈에 띄는, 오래된 상가의 목조건물 2층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나무로 되어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열면 진한 커피향과 함께 3천여 장 이상의 레코드(LP)판과 영국제 탄노이(Tannoy) 오토그라프(Autograph)라는 커다란 스피커가 기다리던 곳이었습니다. 비 오는 날이면 그 스피커에서 나오던 촉촉한 음색이 유난히 깊게 스며들었습니다.


Tannoy_GRF.gif 〈탄노이 GRF 스피커〉
1950년대~1960년대 오래된 빈티지 스피커는 스피커 유닛 자체가 구경이 12“나 15”로 크다. 그래서 스피커를 담는 인클로저도 커져 거실 한 구석에 가구처럼 세워놓는다. 당시의 스피커는 인클로저 설계도가 오픈되어 있어 스피커 유닛만 별도로 구하여 수제작한 스피커가 많다. 탄노이 오토그라프 스피커도 코너형 계열의 GRF 스피커 인클로저와 유사하게 생겼다.


소중한날의꿈(스피커).jpg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 장면〉
2011년 '소중한 날의 꿈'(안재훈, 한혜진 감독)이라는 국산 애니메이션을 보면, 오래전 레코드 판매점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과 친구 여학생들이 레코드를 고르고 음악이 흐르는데, 소파 옆에 세워져 있는 검은색 스피커가 탄노이 구형 GRF 스피커이다. 스피커 위에 오디오 매니아들만 알아볼 만한 SP 축음기와 일본제 마이크로 세이키(Micro Seiki) DDX-1000 턴테이블이 올려져 있다. 스피커 진동에 영향받을 수 있는 턴테이블 위치가 부적절하지만, 감독인지 작가인지 누군가의 오디오에 대한 열정이나 지식을 은근히 알게 해주는 장면이다.


필하모니 사장님 부부는 언제나 조용한 미소로 손님을 맞아주셨고, 직접 블렌딩한 커피는 지금 생각해도 독보적인 맛이었습니다. 클래식 선율이 온몸을 휘감아 도는 휴게실이 없는 일체형 작은 공간이라 커피 맛이 더 진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커피맛의 비결을 물어보았을 때 두 종류의 커피 원두를 섞는다는 답만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학생 시절, 이곳은 내게 작은 아지트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90년도에 화재로 건물과 희귀한 레크드(LP)판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광안리 해변가 카페를 거쳐 대연동 문화회관 인근 레스토랑에 자리잡아 음악 카페로 운영을 이어오고 있지만, 그때의 ‘필하모니’ 분위기를 대신할 곳은 다시 없었습니다.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하며 찾았던 감상실들의 풍경도 생생합니다. 당시 종로의 ‘르네쌍스’, 명동의 ‘필하모니’, 그리고 대학로에 가장 늦게 들어선 '인켈 오디오월드’…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통점은 하나였습니다. 음악을 깊이 듣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조용히 머물 수 있는 공간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대역카페_엔트런스_하츠필드.jpg 〈서울 교대역 인근 카페 ‘엔트런스’에 비치된 하츠필드(JBL-Hartsfield) 스피커〉


종로 르네쌍스는 40년여 역사를 지닌 가장 오래된 클래식 음악 감상실이었습니다. 르네쌍스는 최초 운영하시던 주인분께서 돌아가시고 폐업했다가 새 건물 1층에 재오픈하였는데, 멋진 자태의 미국 제이비엘(JBL)사 하츠필드(Hartsfield)라는 거대한 명품 스피커가 있어서 보는 재미도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우주선 같은 유니크한 모습으로 보였던 하츠필드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피아노 음은 자연스럽게 울리는 사운드가 스피커 중 최고라 할 만했습니다. 르네쌍스가 최근 대학로에 새롭게 현대식 음악 감상실로 재~재오픈한다고 하여 그 시절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희소식이 되고 있습니다.

20160910_143110.jpg 〈클래식 음악 감상실 입장권 – 필하모니, 르네쌍스〉
필하모니 입장권은 음료권이 붙어 있고 가격은 1천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쉐드린(Robin Shchedrin)의 발레곡 ‘곱사등이 망아지(The Little Humpbacked Horse)’ 영상을 LD로 보았을 때의 강렬한 인상은 이후 발레를 특별히 애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입장권에 적혀 있는 나의 손글씨가 새삼 반갑다.


명동에 있던 필하모니는 건물 2층에 있었는데 1층 계단 올라가기 전 입구에서 입장권을 구입하여 들어갔었습니다. 입장권에는 희망곡을 적어서 디제이(DJ) 부스에 제출하면 희망곡이 겹치지 않게 선별하여 들려주는 전형적인 고전음악 감상실이었습니다. 명동 필하모니에는 미국 진공관 시대 알텍(Altec) 사의 궤짝만한 대형 스피커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필하모니는 다른 감상실과 달리 토요일 오후에는 당시 획기적인 레이저디스크(LD)로 유명 오케스트라나 발레 영상을 틀어주어 그 시간대에는 애호가들로 미어터졌었습니다.

그리고 국산 브랜드로 외국산에 필적할 오디오를 제작하여 인기가 있었던 인켈(inkel) 사에서 80년대 중반 대학로에 오디오월드(Audio World)라는 인켈 오디오 전용의 최신식 클래식 음악 감상실 겸 뮤직홀을 열어서 특히 주말에 딱히 갈 곳 없던 음악 고픈 청춘에게 좋은 아지트가 되어 주었습니다. 인켈 오디오월드는 본격적인 레이저디스크(LP) 전문 감상실로 당시 세종문화회관에서 매월 발간하는 「세종문화가이드」에 일일 상영 예정인 레이저디스크(LP) 곡명을 알려주곤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어폰과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습니다. 그 편의성은 당시와 비교할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잃어버린 듯합니다. 바로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우는 울림의 경험입니다. 대형 스피커에서 쏟아져 나오는 음향은 콘서트홀의 현장감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집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감동을 주었습니다. 요즘은 대부분 아파트 공동생활 주거지라 오디오가 있어도 크게 듣지 못하는 환경이기에 음악 감상실 같은 공간의 존재가 그립습니다.

특히 클래식 감상실의 큰 울림은 당시의 청춘들에게는 ‘공연장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키워주는 일종의 입문 과정이 되어주었습니다. 감상실에서 들려주는 곡에 대해 저절로 알게 되고 작곡가와 연주자를 공부하며 음악을 한 곡 단위로 ‘이해’하던 시간, 그 시간을 통해 자연스럽게 레파토리가 늘어나고 음악에 대한 감각이 깊어졌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감상실이 있었기에 나는 공연장으로 나아갈 준비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아날로그 감상실은 내 음악 여정의 귀중한 출발점이었습니다.


세종문화가이드.jpg 〈세종문화가이드 상영정보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발레곡, 쉐드린(Robin Shchedrin) ‘곱사등이 망아지(The Little Humpbacked Horse)’ 보기

마린스키 발레단 &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 지휘: 발레리 게르기에프

(Mariinsky Theater ballet , St Petersbourg Mariinsky orchestra Conductor, Valery Gergiev)

이전 02화1-1. 공부할때 들었던 클래식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