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욕이야말로 가장 큰 욕망이다

금욕주의에 대한 의심과 비판

by 차승


때론 우리는 너무 자신감이 차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아는 것처럼 생각한다. 당장 당신 자신에 대해 생각해라. 당신 자신을 표현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당신 자신을 표현하겠는가? 아마 당신 그 자체의 고유함을 가진 소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어떤 원리에 따라 이끌어지는지에 대한 관심이 부재된 채, 우리는 그저 앞에 보이는 피상적인 것들에만 집중하기도 한다. 이런 피상적인 가치들은 더 직관적으로 판단하기 좋을 때, 예를 들자면 그것을 대표하는 물건이나 인물이 존재할 때, 더 강하게 우리에게 호소하는 듯하다. 가치평가가 쉬운 경우도 이런 피상적인 가치로 활동하기에 적합하다. 특히 가치의 대소 비교가 용이할수록 사람들은 피상적인 가치에 매혹된다. 그것이 가장 큰 원리인 것처럼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을 수도 있다. 피상적인 가치를 맹목적으로 목적의식 없이 쫓고만 있을 수도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고,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라는 것에 집중한 결과, 우리는 더 큰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것이 그저 모호하고 두리뭉실한 허상과도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런 착각의 굴레 중 가장 깊은 함정을 찾게 된다면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바로 이성(logos)이 아닐까 싶다.


이성보다 더 강력한 착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사고에 있어서 이성만큼 기저 믿음이 되는 것이 없다. 현대의 삶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너무나도 과학만능주의의 사회를 경험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과학을 가르치고, 과학적 원리에 근거한 의학은 인체를 자연적 법칙에 따라 현상학적으로 분석한다. 이제는 유전자에 대한 연구는 유전병에 대한 치료를 넘어서서 곧 전인류의 초월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사회는 너무 과학과 수학 등의 이성 근거 학문을 신봉한다. 과학적 발전을 이루면 뭐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엄청나게 위대한 과학이 인류의 영원한 존속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런 과학과 수학은 이성에 많은 영향을 받는 학문들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이성을 믿고 있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능력을 너무나도 흡족스럽게 바라본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좀 진정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그런데, 사람들은 이성 이외에 본능적인 측면이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쉽게 본능을 자유롭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적인 측면을 너무 자랑스럽게 평가하고, 인간의 다른 한 면을 부정스럽고 불필요한 부분으로 본다. 이성에 대한 인간의 엄청난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상황이다.





1. 금욕주의에 대하여


이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컨셉을 확실하게 잡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글은 금욕주의에 대해 열심히 설명함으로써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금욕주의가 무엇인지, 그렇게 살기 위해서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냥 금욕주의가 갖고 있는 심각한 문제와 비인간성을 폭로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욕주의 그 고유한 자체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철학이 뭔지를 잠깐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철학이란 과연 뭘까? 여러 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사상들? 삶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학문? 복잡한 언어로 대중을 속여버리는 기만성?


철학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 여러 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철학이라는 것이 전체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개념이 확실하지 않다. 물론 철학에 있어서 일부의 디테일이 다를 수 있는 것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철학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공통된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세계 아래에 있는 원리를 찾는 것이다.




세계 아래의 원리를 찾는 것?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 같다. 조금만 쉽게 이야기를 풀어서 설명해보겠다. 확실히 우리는 물리적인 세계에 사는 것 같다. 무슨 말이냐면, 당신은 지금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나의 블로그에 들어왔고, 이 글을 읽고 있다. 그리고 당신 앞에는 책상이라든지, 창문이라든지 여러 가지 사물이 존재한다. 내가 굳이 예시로 들지 않더라도 당신 주위에 사물이 빼곡하게 차 있다는 것을 당신도 인정할 것이다. 하다못해 벽도 사물이고 물리적인 대상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당신 주위에서 살짝 시선을 바꿔보자. 당신의 몸을 살펴보자. 당신의 몸은 다른 사물들과 차이가 있는가? 당신의 몸 또한 물리적인 법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자가 분자를 이루고, 분자는 서로 상호작용한다. 특수한 촉매를 이용하여 그 형태를 변화시키기도 하고, 당신의 생각에 따라 근육이 움직여 거시적인 물리 운동을 만들기도 한다.




당신이 지금 쉽게 느끼고 있는 이런 세계, 이것을 '물리법칙의 세계'라고 하자. 물리법칙이 사물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제1의 원리가 되는 세계이다. 그런데 이런 물리법칙의 세계가 과연 다일까? 물리법칙의 세계 아래에 존재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철학은 사실 눈에 보이는 물리 세계를 넘어선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찾아 나선다는 데 의의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자들의 가르침에는 욕구를 억제하라든가, 행복을 추구하라든가 이런 방식의 주장이 많은데, 결국에 이런 철학자들도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탐구하려고 했다는 데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다. 결국, 철학은 내가 볼 수 있는 세계 아래에 존재하는,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인 힘과 원리를 이해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서론이 조금 길어서, 이쯤 되면 탈주하는 사람이 생길 것 같다. 빠르게 금욕주의로 다시 돌아가 보자.



우선, 인간의 기저에 깔려있는 근본적 원인을 쉽게, 그리고 크게 나누어 2가지로 나누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이성의 원리이다.


이성에 대해 내가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성에 대해서는 잘 알지 않은가? 지금 이 글은 철저하게 이성 중심이다. 글이 이성이라는 원리에 호소하는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이 글을 읽으면서 일차적으로 무언가를 논리적으로 생각한다. 이 글을 쓴 인간의 생각이 대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이성이다.



반면 두 번째 기저는 욕망이다. 욕망은 쉽게 말해 당신의 감정적인 원인이 될 수도 있고, 당신의 본능적인 충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욕망은 이성으로 쉽게 이해하기 어렵고, 인간 모두가 보편적으로 갖고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특이한 것은 욕망을 바라보는 학자들의 견해가 다르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욕망을 굉장히 크게 보기도 하고, 작게 보기도 한다. 설명하겠지만, 금욕주의자들은 욕망을 굉장히 작은 일부로 간주하는 사람들이다.



자, 그렇다면 인간이 이렇게 이성과 욕망, 2가지 원리로 작동한다고 생각하자. 정리하면, 인간의 물리적 특성 아래에 이성이라는 것과 욕망이라는 두 속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속성들은 인간의 행동과 사고의 기본적인 동기다. 어떤 철학자는, 대표적으로 니체는, 욕망과 같은 자연스러운 대상을 존중하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철학자들은 절대적인 순수한 이성을 따라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금욕주의자들은 후자에 속한다. 대표적인 그리스 철학 중 하나인 스토아학파는 자연의 법칙인 logos를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 자아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금욕을 통해 욕망을 몰아내야 하는 것이다.





2. 금욕주의 = 질병


이제부터 나의 생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나도 예전에 금욕주의가 한동안 삶의 실현을 가져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믿었다. 지금은 금욕주의가 잔혹하고 무자비한 사상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금욕주의는 사실 엄청나게 매력적인 생각이다. 정말로 금욕주의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듯한 착각을 준다.


그렇다면 왜 금욕주의는 이런 착각을 주는 걸까? 왜 금욕주의를 믿는 사람이 생기는 걸까? 흔히 이성적인 사고방식이 금욕주의를 옹호하는 근거가 되는 것 같다. 이성이 금욕주의를 더 옹호한다고? 금욕주의가 이성을 옹호하는 관계가 아니었던가?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해보고자 한다.



앞서 나는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가 이성을 강조하는 학파였다고 설명했다. 금욕주의자들은 욕구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이성을 넣는다면 삶의 번뇌 등으로부터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계를 살핀다면 우리는 금욕주의가 이성을 옹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성 또한 금욕주의가 더 견고한 이론처럼 보이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삶에서 꾸준히 고통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 나갈 때 배가 아프기도 하고 고통스러워한다. 혹은 내가 생각했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를 냈을 때 고통스러워한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우리가 왜 고통스러워할까?




금욕주의자들의 생각은 이러하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이유? 그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원하고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여기서 금욕주의자들은 상당히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데, 이 고통의 해결책으로서 욕망을 완전히 없애는 선택을 한다. "만약 욕망이 없다면, 우리는 실망할 일도 없지 않을까?"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봤을 때, 욕망을 몰아낼 수 있다면 우리는 삶을 정말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 이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말할 것 같다. 욕망을 없애는 과정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데, 이것은 금욕주의가 이성을 너무나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단한 이성을 이용하여 본능을 몰아낼 수 있다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수련을 통해 금욕주의적 생활을 하면 무욕을 결국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왜 금욕주의자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려고 할까? 금욕을 할 때 좋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궁극적인 목적마저도 삶에 대한 일종의 의지와 욕망을 포함하고 있다. 즉, 금욕주의자는 덫에 빠지게 된다. 금욕주의라는 수단을 택했지만, 금욕의 최종 도달지는 욕망이 된다.



금욕주의가 문제인 이유는 또 하나 더 있다. 금욕주의는 자신을 부정하는 철학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인간을 구성하는 두 가지 기저는 크게 이성과 욕망이었다. 그런데 금욕주의는 이 두 가지 주축 중 이성을 너무 크게 평가하여 욕망을 경시했다. 그 결과 금욕주의자들은 자신의 축인 욕망을 부정하고 억지로 자신의 형태를 바꾸려고 노력한다. 이런 금욕주의는 자기부정적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흔히 수행이라고 불리는 이 금욕적 과정에서, 인간은 본성과는 맞지 않는 이성 위주의 생활에서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욕망이라는 인간 그 자체의 기질을 부정한 결과 삶을 쾌적하게 만들기는커녕, 삶을 더 극심한 나락으로 밀어 넣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금욕주의는 곧 질병이다. 건강한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질병으로 작용한다.



그럼 사람들은 왜 뻔히 고통스러울 것 같은 금욕주의 생활을 무시하고, 금욕주의 생활에 많은 시기를 바쳤던 것일까? 실제로 성직자와 같은 경우 결혼 등을 금지하는 등의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 종교가 아닌 다른 사회 문화에서도, 혹은 사상가마저도 일부는 금욕주의를 믿었는데, 이런 금욕주의 생활은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있는 밈으로 자리 잡았을까? 그리고 왜 이 밈은 멸종하지 않는 것일까?


앞에서 말한 이성과의 상호작용도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가장 큰 것은 인간이 무욕을 실현한 상태를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한 번 무욕의 상태를 생각해보자. 욕심이 하나도 없고 세상에 있는 사물을 그대로 쳐다보는 상태. 이런 무욕의 상태를 생각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당신이 정말로 무욕을 '실현한' 것이 아니라 무욕을 '상상하고' 있다는 것! 무욕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무욕을 상상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상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적인 상황이며, 이 모든 가상은 이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인간에게 더 적합한 철학을 찾아야 한다. 자신을 부정하는 철학은 설득력 있고, 강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길인 것 같지만, 결국에 불가능한 것은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고, 우리는 이런 필연성의 범주 내에서 철학을 찾아야 한다. 불가능한 가상에 입각하여 설득력을 얻는 철학보다 실제를 존중할 줄 아는 철학을 그렇기 때문에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글의 주제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쯤에서 이 이야기를 끊지만, 다른 글을 통해 '인간적인 철학'을 다시 한번 다룰 것이다.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만 마무리 짓겠다.



삶-이것은 바로 이러한 자연과 다르게 존재하려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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