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어 차차, 림 / 포토그래퍼 영랑
* 여진 님과의 인터뷰입니다.
평소에 자주 글을 쓰세요?
글 쓰는 걸 좋아하긴 해요. 근데 좋아하는 거랑 자주 하는 거랑은 별개의 영역이다 보니까, 자주 쓴다고 말하지는 못해요. 사실은 제가 상대와 대면해서 대화할 때는 스스로를 감추는 편이거든요. 그래도 혼자 글을 쓸 때는 머릿속의 생각을 어느 정도 정제하고 쓸 수 있어서 마음을 투명하게 담아낼 수 있어요. 어쩌면 글로 나를 드러내는 게, 말로 나를 표현하는 것보단 덜 무서웠던 것 같아요.
3년 전, 연극에 도전하셨던 이유가 궁금해요.
전 스스로를 내보이길 무서워하는 편이었어요.
우리는 보통 환경이 바뀌는 때를 분기점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대학에 입학하고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면서, 그때를 기회 삼아 그냥 한 번 다른 사람이 돼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연극동아리에서 공연을 올리고 배우가 되어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던 것 같아요. 겁이 많아서 잘 도망치는 성격이라 도망칠 구석을 두고 싶지 않았거든요. 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도전을 시작한다면, 앞으로 재밌게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죠.
배우가 된다는 건 가장 높은 난도의 선택지였을 텐데요. 정면 돌파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저는 한 번에 여러 도전을 할 수는 없는 것 같거든요. 대신, 맡은 바에 대해서는 후회가 안 남을 만큼 열정을 쏟아내고 싶다고 생각해요. 정면 돌파를 잘한다기보다는, 워낙에 올인을 하는 성격이라 화끈한 선택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그런 화끈한 선택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정면 돌파를 한다는 건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견디기 힘든 순간의 연속이었어요. 사실 되게 괴로웠어요. ‘나도 저 사람들처럼 잘하고 싶은데, 도대체 난 왜 이러지?’ 같은 생각을 많이 하기도 했어요.
근데 그게 반복이 되니까 어느 한순간에 깨닫게 되더라고요. 보여주기 싫어서 숨기려고 했던 내 모습도 사실 내 정체성의 일부분이라, 결국 그게 나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요. 사람의 정체성에 긍정과 부정을 따질 수는 없잖아요. 스스로를 극복하기 위해 연극을 시작했지만, 나는 극복하거나 바꿔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평생을 끌어안고 같이 살아가야 할 ‘나’ 임을 인정해 나갔던 것 같아요.
처음 시작할 땐 극적인 변화를 꿈꿨던 것 같은데, 연극을 올리고 난 후에도 그런 변화는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어요. 연극이 끝난 뒤에도 나는 그대로 나였죠. 그냥 남들 앞에 스스로를 내보이는 게 조금은 편해진 정도예요. 누군갈 흉내 내려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로 있는 거, 그런 걸 좀 배운 것 같아요. 그리고 그건 무너진 내 모습까지도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연극을 통해 직접 경험한 덕분이기도 해요.
교환학생 생활 중, 우연히 좋아하는 걸 찾게 됐다고 들었어요.
어릴 때부터 ‘나는 뭘 좋아하지?’라는 질문에 대답을 못 했어요. 꿈이 없었거든요. 학교 진로 희망 사항에도 뭘 적어야 할지 몰라서 주변에서 잘할 것 같다고 말해준 것들을 따라왔고, 상경 계열 진학도 그런 식으로 선택했어요. 그러다 의무감에 자기소개서를 한 번 썼는데, 제가 봐도 그건 저에 대해 소개하는 글이 아닌 거예요. 이전까지 전공과 안 맞는 것 같다고 느낀 적은 많았지만, 글을 통해 확인하게 되니까 아프긴 하더라고요. 갈피를 못 잡던 중에 그런 모든 고민을 교환 다녀온 이후로 미루고 그냥 떠났어요.
사실 처음에는 불시착이라고 생각했어요. 스페인에 가고 싶어서 교환학생을 준비했던 저는 오스트리아에 와있었고, 전공인 경제학, 통계학과 관련 없는 사회복지학 전공 수업을 듣게 됐으니까요. 그런데 오스트리아 시골에서 생활하면서 불시착이라 생각했던 곳에서도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오스트리아의 교수님께서는 제가 전공생이 아닌 교환학생인 걸 아시면서도 저를 진지하게 대해주셨어요. 제도와 법에 대해 배우고 앞으로 이 분야에서 일을 하려면 꼭 갖춰야 할 사고방식을 배워나가면서, 순수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기본 점수만 받을 생각으로 소극적이었던 발표도, 준비하다 보니 재밌어져서 최선을 다했고요. 수업을 들으면서, 이런 성취감을 계속 느낄 수 있다면 이 분야를 계속 공부해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스트리아에서의 교환학생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제가 지냈던 포어아를베르크가 완전 시골이에요. 그래서 친구들이랑 자주 피크닉을 가고, 강에서 캠프파이어를 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은 태양풍이 강해져서 오스트리아에서도 오로라가 보인다는 거예요. 북극권이 아닌데 오로라가 보인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거의 10명 정도가 모여서 근처 호수에 오로라를 보러 갔어요. 막상 가니까 오로라가 육안으로 보이진 않았고, 그냥 희끄무레하게 뭔가 있구나 싶은 정도였어요. 다들 아쉬워하며 돌아섰는데, 촬영해 둔 사진을 다시 보니 우리가 본 그 희고 옅은 띠가 오로라가 맞았던 거예요. 그때가 되게 기억에 남아요.
귀국 이후의 생활에 특별한 기억이 있다고 하셨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해서 1인 가구의 삶에 익숙해졌어요. 그러다 교환학생을 다녀온 후 휴학을 하고 처음으로 본가에서 세 달을 지내게 됐죠. 어느 날 엄마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는 왜 집에 있는 걸 어색해하냐”고요.
그때부터 가족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제 나름의 노력을 하기 시작했어요. 낯간지러워도 가족 메신저에 제가 듣고 본 걸 공유하기도 하고요. 처음엔 가족들도 이런 제 모습을 어색해했어요. 다들 경상도 분들이고 시크한 타입이라 그런지, 말을 돌리시더라고요. 부모님께 ‘다음에 이거 먹어보자!’ 했는데 ‘서울은 덥나?’ 하는 엉뚱한 답장이 오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그 자체로 웃기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가족들이 참 귀여웠어요.
막상 해보니까 이게 사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거예요. 진짜 쉬운 일이었는데 그게 귀찮아서,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안 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반성을 많이 했어요. 나중엔 다시 서울에 올라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까워지기도 했고요. 나를 잘 아는 사람들과 같이 일상을 함께한다는 게 진짜 행복한 일이라는 걸 그때 느낀 것 같아요.
'3년 뒤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요?
후회 없이 살자고 항상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미련을 많이 남긴 것 같아요. 나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3년 뒤엔 '미련보단 소중한 기억을 더 많이 남겼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미련이 남는다는 건 어쨌든 스스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든가, 내 선택이 아쉽다든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거잖아요. 사실 뭐가 더 나은 선택이었을지는 돌아보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는 건데도요. 지금 내가 마음먹는 것만큼 내 영역이고, 애썼던 과정 자체가 소중하다는 걸 잊지 않고 싶어요. 20대 후반이 되어 지난 시간을 돌아봤을 때, 그냥 소중한 게 참 많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어 차차, 림 / 포토그래퍼 영랑
2025. 05. 13. 여진 님 인터뷰
*휴스꾸를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Humans of skku]
휴스꾸(Humans of skku)는 2013년부터 성균관대학교의 교수, 직원, 학생과 근처 상권까지 인터뷰 대상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장문의 인터뷰 본문, 깊이 있는 사진과 휴스꾸를 꾸려나가는 운영진의 이야기까지 다채로운 휴스꾸의 모습을 담아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