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어 민 / 포토그래퍼 채은
* 이평수 교수님과의 인터뷰입니다.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먼저 부탁드립니다.
저는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평수 교수라고 합니다. 청나라, 그중에서도 하층민을 전공하고 있어요. 보통 우리가 하층민이라고 하면 농민을 떠올리겠지만 저는 농민보다도 더 하층민, 그러니까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죠. 당시 중국에서는 ‘비밀결사’로 불렸던 사람들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원래 꿈이 교수이셨나요? 교수가 되신 과정이 궁금해요.
사실 제가 학부 때는 공부하고 별로 관계가 없었어요. 지난번에 동문 친구들 만나서도 이야기했지만, 전 ‘공부하면 폭망할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제가 되게 멋있다고 느낀 선배가 있었어요. 지금은 사학과에서 과 답사를 가면 조교는 안 가잖아요. 예전에는 답사를 가면 답사 부장이 유적지에 관해 설명하긴 하지만, 전반적인 인솔은 조교가 맡았거든요. 그때가 군사 정권 막바지여서 답사를 가서 캠프파이어 같은 걸 하면 조교 형이 민족과 국가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했거든요. 그런 걸 들으면 눈물이 글썽글썽하면서 ‘저렇게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선배님들한테 물어보니 조교가 되려면 대학원에 가야 한다는 거야. 조교가 되고 싶어서 그때부터 대학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죠.
사실 제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몇 번 있었는데, 그게 다 이렇게 우연히 찾아오곤 했어요.
사실 저는 ROTC였어서 대학원하고 별로 상관이 없었어요. 그때 당시만 해도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이라, 대한민국에서 ROTC를 하면 거의 다 취직이 됐어요. ROTC라면 대학에 상관없이 졸업 후에 서너 군데씩 기업에 합격을 해놓고, 제대 후에 골라서 가던 시절이었죠.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할 때, 리더십을 가진 인재가 필요해서 부대를 이끌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필요로 했거든요. 저도 그랬고요.
대학원 시험은 그냥 조교 자격증을 획득하기 위한 거였어요. 4학년 때 이제 저의 지도교수님이셨던 박기수 교수님 아래로 시험을 봤는데, 모르는 문제가 나와서 되게 당황했던 기억이 나요. 서술형으로 상앙의 변법이 나왔는데, 그때는 상앙이 누군지도 몰랐거든요. 그냥 진시황 때 이전 같아서 진시황의 천하통일 얘기만 잔뜩 써놨는데 교수님이 붙여주시더라고요. 농담으로 선생님은 석사, 박사 다 수석으로 들어갔다고 말해요. 시험을 전부 혼자 봤거든요. (웃음) 그렇게 대학원 시험을 보고 나서는 여러 기업에 지원해서 합격증을 받았어요. 졸업할 무렵 제 마음은 남산 밑 제일제당 본사에 있었죠. 제일제당도 가고 싶고, 농협도 괜찮은 것 같고.
그런데 졸업 후에 군대 들어가고 1년 뒤에 IMF가 터진 거예요. 합격이 다 취소됐지. 그러고 2년 반의 군 생활을 끝내고 제대했는데, 취업이 안 되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지도교수님께 전화가 온 거예요. “제대했으니 이제 대학원 올 거지?” 그때까지 교수님 아래로 대학원생이 한 명도 없었거든요. 뭐 경제가 안 좋다고 하니까, 그러면 ‘대학원에 잠깐 있어야겠다’ 해서 대학원에 가게 된 거예요. 가서 학과 조교도 결국 해보고, 쭉 공부하다 교수까지 됐고.
원래 교수를 목표로 하신 건 아니셨군요.
그렇죠. 학부 때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교직 과목을 듣긴 했었는데, 교수가 되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마저도 ROTC 때문에 4학년 때 관뒀고요.
제가 가끔 학생들한테 하는 얘기가 졸업한 이후에 인생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거예요. 사람 인생 진짜 어디로 튈지 몰라요. 용수철처럼요. 우리 지도교수님 아래에 우리 학부 출신 대학원생이 저를 제외하고 딱 2명 있었는데, 이 후배들이 엄청나게 똑똑했거든요. 그런데 공부를 잘 해오다가 한 명은 세무공무원이 됐고, 한 명은 갑자기 스님이 됐어요. 지금은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강의해요. 이런 일이 많아요.
그런데 이 용수철이 튕기고 진로가 정해지면, 정말 목숨 걸고 열심히 해야 해요. 저도 딱히 하려고 한 건 아닌데 공부하게 됐잖아요. 아무튼 내가 공부하기로 한 거니까, 그 시간만큼은 온 힘을 다해서 했죠.
동양사 전공으로 석사 공부를 하려면 중국어, 일본어 등 여러 외국어를 알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석사 다닐 때 중국어도, 일본어도 하나도 몰랐어요. 사전에 침을 묻혀가며 혼자 공부했는데, 석 달이면 고려대학교 중국어사전이 너덜너덜해져서 또 사야 했어요. 그땐 네이버사전 뭐 이런 것도 없었으니까. 제가 박사를 성균관대에서 한 번 하고, 북경대에서 또 한 번 더 했어요. 박사논문은 한 번 써봤다고 더 쉬운 게 아니거든요. 중국어도 어렵고, 한국에 두고 온 애기랑 집사람이 보고 싶어서 울면서 썼죠, 정말.
교수님 수업은 학기 말에 진행되는 교수님의 인생사 특강으로 유명하잖아요.
이 특강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제가 성균관대 오기 전에 충북대에서 근무했었잖아요. 그때 전남대에서 진로 특강을 할 일이 있었어요. 전남대 사학과에서는 1학년들 필수 과목으로 진로 과목이 있더라고요. 3학점짜리 수업인데, 여러 진로에 해당하는 외부 강사를 초빙해서 진행하는 거예요. 교수, 문화 해설사, 박물관 직원 등 사학과 졸업생이 가는 다양한 진로를 보여주는 거죠. 그전에 전남대에서 일본사 하시는 강은영 교수랑 업무적으로 만난 적이 있는데, 좀 친해져서 내 얘기를 했었거든요. 나중에 강 교수한테 전화가 와서, 이 진로 과목 시간에 자기한테 했던 내 인생 얘기를 좀 해주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그냥 말로만 하면 그러니까, 그때부터 PPT를 만들기 시작한 거죠.
이걸 본격적으로 하게 된 건 우리 학교에 와서였어요. 여러 목적으로 하게 된 거죠. 우리 과 전공이랑 직결되는 교수라는 진로를 소개하고, 이렇게 열심히 해야 교수를 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또 선생님에 대해 궁금해하는 학생들도 있으니 그 학생들에게 전공 교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보여주고요. 하면서 이제 중간중간 ‘사람 인생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라는 얘기도 좀 곁들이고. 올해는 특별히 우리 깜찍이 여사, 깜 여사도 공개했죠. 이거 하고 나면 학생들이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내분과 학부 시절에 만나셨다고 들었어요.
아내분과의 연애사를 여쭤봐도 될까요?
아내는 유학과(현 유학동양학과)를 나왔어요. 내가 4학년일 때, 5월에 아내를 처음 만났죠. 그때 아내는 1학년이었어요. 3살 차이죠. 그런데 만난 그다음 해 2월에 제가 군대에 갔어요. 아내는 제가 ROTC니까 군대를 안 가는 줄 알았대요. 군대 갈 줄 알았으면 안 만났다고. (웃음) 그래서 제가 “나 기다리지 말고 너 갈 길 가라, 곧 2학년이니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했죠. 그런데 제대할 때까지 맨날 부대로 찾아오더라고요. 장교니까 주말에는 밖에 나왔거든요. 그 덕분에 우리 집사람은 학점도 별로 안 좋아요. (웃음) 저는 사실 너무 좋았죠.
연애는 오래 못 했어요. 제가 3남 1녀 중에 장남인데, 아버지가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하시기도 하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저를 되게 좋게 봐주셔서 제대하고 1년 뒤에 바로 결혼했어요. 그때 제가 스물여덟, 집사람이 스물다섯이었죠. 집사람이 대학 졸업한 지 1년 좀 지났을 때였어요.
아까 말씀하신 ‘깜찍이’가 혹시 아내 분 애칭일까요?
네. (웃음) 연애할 땐 눈이 부실 정도로 예쁘고 깜찍해서 깜찍이, 부인되고 나서는 이제 깜 여사. 애들도 별명이 있어요. 큰 애는 이름이 미나인데 미뚱이, 작은 애는 예나라서 예똥이. 미뚱이, 예똥이에요.
일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이신가요?
가족들하고 외식할 때요. 제가 결혼하고 나서 베이징으로 유학을 갔잖아요. 북경대에서 박사 공부한 기간만 5년이고, 베이징에 학술연수다, 뭐다 해서 왔다 갔다 한 기간까지 합하면 한 10년은 되죠.
처음 북경대에서 박사 공부를 시작했을 때가 큰딸이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였어요. 중국에는 저 혼자 갔었거든요. 원래는 아내한테 중국에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안 간다고 하더라고요. 중국 음식이 입에 안 맞는다고. (웃음) 사실 경제적으로 데리고 갈 형편도 안 됐었고요.
박사 공부하면서는 애들을 거의 못 봤어요. 1년마다 한국에 가긴 했는데, 사실 거의 못 본 거죠. 둘째 딸은 북경대에 입학하고 1년 뒤에 태어났는데, 졸업하고 나니까 애가 갑자기 한참 커있더라고요. 응애응애 울던 어린 시절부터 봐야 했는데, 어느 날 보니 이상한 애가 집에 있더라고. 큰 애기도 정말로 귀여운 대여섯 살 때부터 거의 못 봤고. 그러다 보니 한동안 약간 딸들하고 서먹서먹해졌어요.
요즘에는 큰 애기는 대학생이고 작은 애기는 고등학교 1학년이라 다들 바빠요. 가족끼리 밥 먹을 시간도 별로 없죠. 나는 안 바쁜데. 아니 사실 나도 바쁘긴 한데, 그래도 나는 시간 많이 낼 수 있는데. (웃음) 큰 애기는 큰 애기 나름대로 제 남친까지 생겼으니 더 바쁘고, 작은 애기는 공부에 다이어트에 할 게 많은데 아빠가 밥 먹자고 하면 싫어하고. 그래서 그냥 가족들하고 어디 좋은 데 가서 같이 밥 먹는 게, 개인적으로 일상에서 느끼는 가장 큰 행복이에요.
학생들이 대학 생활을 하며 꼭 해봐야 하는 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어렸을 때 되게 내성적이었어요. 초등학생 때 선생님이 “평수 너 일어나서 발표해 봐” 하시면 말도 거의 못 하고, 얼굴도 막 빨개지고 그랬죠. 옛날에도 생기부 같은 게 있었는데, 초등학교 6년이랑 중고등학교 6년 내내 ‘내성적’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런 성격이 처음 바뀐 게 ROTC 할 때였어요. ROTC는 장교가 되는 거니까 내가 부하들을 지휘해야 하는 거잖아요. 3학년, 4학년이 되면 동기들 앞에서 직접 지휘 시연을 해야 해요. 당시에 서울 캠퍼스랑 수원 캠퍼스랑 합치면 100명이니까, 적어도 한 50명 앞에서 시연을 해야 하는 거죠. 그걸 하다 보니 자신감도 많이 생기고, 사람들 앞에서 막 얼굴 빨개지고, 심장 뛰고 하는 것도 많이 없어졌어요. 그리고 중국에서 유학할 때도 내성적인 게 많이 고쳐졌죠. 중국에서는 가게에 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하면 쳐다도 안 봐요. 막 가서 시끌벅적하게 얘기해야 주인아저씨가 나를 인식해 주지.
이렇게 제 성격이 변한 여정을 보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경험을 많이 해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머릿속에만 담아놓으면 안 되고 실제로 해봐야 해요.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앞에 있는 학생처럼 기자가 하고 싶다면 대학교 때 기자 관련된 활동을 해봐야죠. 공부도 그렇고, 뭐든 적극적으로 경험해 보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또 여러 가지 경험을 한다는 건 여러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기도 하거든요. 저도 ROTC에서 동기들과 군사훈련도 하고, 합숙도 하면서 사람 대하는 법을 익혔어요. 이렇게 사람 만나는 게 나중에 본인의 진로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인문학 하는 친구들은 진로가 어디로 향할지 모르니까, 대학교 때 많은 경험을 쌓는 게 졸업 후에 진로를 정할 때 도움이 될 거예요. 용수철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요. 다만 학교 다닐 때 여러 준비를 잘 해두면, 용수철이 좋은 방향으로 튈 때 더 빨리 갈 수 있는 거죠.
인터뷰어 민 / 포토그래퍼 채은
2025. 12. 29. 이평수 교수님 인터뷰
*휴스꾸를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Humans of skku]
휴스꾸(Humans of skku)는 2013년부터 성균관대학교의 교수, 직원, 학생과 근처 상권까지 인터뷰 대상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장문의 인터뷰 본문, 깊이 있는 사진과 휴스꾸를 꾸려나가는 운영진의 이야기까지 다채로운 휴스꾸의 모습을 담아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