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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의달빛정원 Jul 20. 2018

[사물 체험 놀이] #4 낭만 버튼

공감능력 향상을 위한 사물체험

상담심리사에게 공감은 중요한 덕목입니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 정확하게 이해하되 매몰되지 않고 다시 빠져나올 수 있는 메타인지를 갖추면 좋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사물이 되어 남의 삶을 겪어보기로 했습니다.


나는 21년 된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버튼이다.

                                                 

엘리베이터 버튼

                                                                                                                                                                                                                 

나에게는 스물한 개의 숫자와 비상 벨, '열림/닫힘' 버튼이 있다. 주로 어둠 속에서 눈만 뻐끔거리다가 가끔 환해지면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철판 벽에 붙어 있어 움직일 수 없는 몸이니 사람들의 손길에 따라 1층부터 21층까지 오르내리면서 무료한 삶을 보내고 있다.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바꾼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탔다고 일부러 정전을 낼 수도 없고, 잘못 누른 숫자를 다른 번호로 바꿔주는 기능도 없다. 문이 열릴 때마다 달라지는 순간에 의도적으로 주의를 집중하고, 매 순간의 경험을 판단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것이 나름 터득한 삶의 지혜다.

자유 이동권이 없는 나 같은 금속 조각에게도 어둠의 시간을 버티게 하는 즐거운 순간들이 있다. 오후 3시 반이 되면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네 살 꼬마 아이가 있는데, 나는 3시부터 아이가 기다려진다. 발 받침대에 올라서서 간신히 14층을 누르면서, "내가 누를 거야!"하고 으쓱해하는 그 표정과 보드라운 손가락의 촉감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캄캄한 공간에서도 혼자 미소 짓곤 한다. 데이트하러 나가는 17층 언니의 상큼한 샴푸 향기를 맡을 때도, 외동딸의 양 볼을 쓰다듬으며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10층 아줌마의  눈웃음을 볼 때도 너무 좋다. 그래서 아줌마가 음식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 거울을 보며 뱃살을 움켜지는 것도 슬쩍 눈감아준다.

가끔은 삶의 지혜를 배우기도 한다. 치킨 배달 청년은 꼭 한 층 위 숫자를 같이 눌러 둔다. 계산이 끝나자마다 도착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는 거울을 보며 씩 하고 웃는다. (짜식~) 10층에 물건을 내려놓는 택배기사의 아이디어는 놀랍다. 그는 '열림' 버튼을 누른 채  한쪽 발로 엘리베이터 문을 막고 최대한 다리를 벌린다. 그러고는 긴 막대기로 그 집 벨을 누른 뒤 주인이 나오면 박스를 내려놓고 순식간에 '닫힘' 버튼을 누른다. 사나운 1001호 개가 튀어나와 바지 자락을 물어 기겁을 한 뒤로는 그 집에 올 때마다 꼭 막대기를 챙겨 온다.

사실 엘리베이터 버튼으로 산다는 건 꽤 인내심이 필요하다. 월드컵이나 프로야구 시즌에 진동하는 치킨 냄새를 참아야 하고, 방귀 뀌고 나가버리는 3층 아저씨의 괘씸한 행동도 견뎌야 한다. 내 몸의 숫자를 모두 눌러놓고 튀는 개구쟁이 녀석은 그나마 봐줄 수 있는데, 우산 끝으로 나를 누르는 모자 쓴 18층 녀석의 건방진 눈빛은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다. 특히, 같은 라인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말없이 휴대폰만 들여다볼 때는 그 어색한 침묵이 정말 불편하다. 그저 한 마디 인사를 주고받는 게 그리 힘든가. 입구에서 달려오는 분을 위해 '열림' 버튼을 눌러주는 8층 아줌마를 봐라. 얼마나 다정한가!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슬픈 기억도 있다. 15층 현관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강아지가 1층 현관으로 실려내려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강아지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경로당에 가실 때마다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5층 백발 할머니가 생각난다. 지난 5월, 할머니는 평소와 다르게 나를 누르지 않았다. 손가락을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멍하게 흐려진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거다. 7층 할머니가 성당에 가려고 벨을 누를 때까지 마냥 그렇게 어둠 속에 서 계셨다. 요즘 백발 할머니는 딸이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은 채 주간 요양보호 센터에 다니신다.  

나에게는 세 가지 소망이 있다. 첫째는 진정 '더블 클릭'이고 싶다.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는 배려심 있는 버튼이고 싶다. 둘째는 사람들이 제발 손가락으로 나를 눌러주길 바란다. 나는 우산 꼭지나 자동차 열쇠보다 사람의 손가락 체온이 더 좋다. 셋째는... (이건 좀 욕심이 과하지만) 인공지능 버튼이고 싶다. 감정 로봇처럼 사람들이 나를 누를 때마다 그 사람의 건강 상태와 기분을 알고 적당한 음악과 향기를 제공해주고 싶다. 여러 사람일 경우에는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해서 가장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면 된다. 상상해 보라. 엘리베이터라는 작은 공간에서 본인의 기분과 컨디션에 맞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좋아하는 향을 맡을 수 있다면 얼마나 편안할까.

이런 상상을 하는 나는....  

진정 '낭만 버튼'이구나.       



[네이버 블로그] 모모의 달빛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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