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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예림 Oct 18. 2024

9년 만에 찾은 남편의 고향, 으드르

 튀르키예

결혼 9년 만에 튀르키예를 찾았다.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의 고향을 가보는 것이었다. 튀르키예 방문을 앞두고 몸과 마음은 참으로 분주했다. 9년 동안이나 밀려 있던 식사 자리, 친지 방문 그리고 엄청난 수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고향인 튀르키예를 9년이 지나서야 다시 찾게 된 이유가 있다. 내 남편은 튀르키예 출신 기자 알파고 시나씨다. 한국으로 파견된 튀르키예 최초의 특파원이었던 남편은 2016년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반정부 언론인으로 낙인이 찍혀버렸다. 남편이 몸담고 있던 언론사가 대통령 에르도안의 아들이 저지른 비리를 폭로하며 눈 밖에 났고, 쿠데타 배후로 지목되면서 남편을 포함한 언론사의 모든 기자가 하루아침에 해직 기자 신세가 됐다. 2016년에 벌어진 쿠데타가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에르도안 정부의 자작극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지금까지 3,000명이 넘는 기자가 구속 됐고, 남편의 이름도 여전히 체포리스트에 올라가 있다.


정치적 난민이었던 남편은 2019년에 한국인으로 귀화했지만, 여전히 튀르키예에는 입국할 수 없다. 언젠간 체포 영장이 풀리기를 기다렸지만 벌써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러버렸다. 그 사이 아이가 태어났고,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고향이 그리울 남편을 대신해 가족들과 충분히 시간을 보내고 오는 것,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다.


보통의 경우 짐을 가볍게 챙겨 여행을 떠나는 우리도, 이번엔 캐리어 두 개에 선물을 꽉꽉 채워 담았다. 어른들이 좋아하는 홍삼과 사촌들이 부탁한 화장품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한국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한 가지 특별한 요청을 했다. 새 제품이지만 집에 너무 많거나 더 이상 쓸 것 같지 않아 결국 버려질 운명에 처한 물건들을 기부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요청은 꽤나 반응이 좋았다. 우리는 우산, 나무 도마, 수저 세트, 마스크팩, 옷, 부채, 휴대용 선풍기 같은 물건을 받았다. 기부하는 사람들은 새 물건을 버려야 하는 불편함과 부담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우리는 쓰임이 있는 곳에 전할 수 있어 뿌듯한 마음이었다.


알파고의 고향은 튀르키예 동쪽 끝에 자리한 으드르(Iğdır)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과 국경을 맞댄 작은 도시다. 으드르로 가려면 인천에서 튀르키예까지 열한 시간 반을 비행한 후, 국내선을 타고 다시 두 시간 반을 더 가야 했다. 고생길이 훤한 여정이었다. 튀르키예 친구들에게 “남편 고향이 으드르야”라고 하면, 대부분은 깜짝 놀라면서 “으드르라고?” 되묻는 곳이었다. 튀르키예 사람들도 거의 방문하지 않는 외딴곳인 으드르는 튀르키예의 소수민족인 쿠르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다.


남편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쿠르드 반군을 잡기 위해 정부군과 쿠르드족 사이에 시퍼런 대립이 이어졌다. 총과 칼을 맞대는 사이, 정부는 반군의 은신처를 파헤치겠다며 울창한 숲으로 가득했던 아라랏 산을 불태워 버렸다. 10년 전, 결혼식을 하러 으드르에 왔을 때, 나무 한 그루 심기지 않은 산이 기괴하고 신비롭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튀르키예 사람들의 머릿속에 으드르는 위험하고 볼 것 없는 동네로 새겨져 있어 “도대체 으드르를 왜 가?”라는 반응을 했던 듯싶다.


이스탄불 공항에서 으드르행 비행기를 기다렸다. 곧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으드르 비행기를 기다리는 여성들은 한여름에도 팔과 엉덩이를 가리고 무릎 아래까지 덮은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주로 머리를 가리는 히잡을 두르고 있었고, 옷도 밝은 계열보다는 어두운 쪽에 가까웠다. 남성들 중에는 기도할 때 사용하는 이슬람 모자 타키야를 착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스탄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이스탄불은 여느 유럽 도시들처럼 모두가 자유분방했다. 동부는 쿠르드족의 고향이라 곳곳에서 쿠르드어도 들려왔다.


비행기 착륙을 안내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리곤 창문으로 얼굴을 가까이 댔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일 년 내내 만년설로 뒤덮인 아라랏 산이었다.


‘정말 정말 그리웠어. 넌 변함없이 여전히 아름답고 웅장하구나.’


보고도 믿을 수 없던 아라랏 산의 풍경들


10년 전에 이 도시에 왔을 때도 으드르 어디에서든 마음만 먹으면 아라랏 산 봉우리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잘 왔다 싶었는데, 이제는 내 아이와 이 추억을 공유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흥이 났다.


“저기 보이지? 성경을 보면 아주 오래전에 지구에서 엄청난 홍수가 났다고 나오거든? 그때 하나님이 노아에게 커다란 배를 만들어서 동식물을 태우라고 하셨어. 그 노아의 배가 마지막에 멈춘 곳이 바로 저 산이라고 알려져 있어. 5,000m가 넘는 엄청 높은 산이지. 제주도에 있는 한라산 알지? 한라산 두 개 반을 연결한 높이야.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이 산을 보면서 꿈을 키웠대. 언젠가 저 아라랏 산처럼 큰 사람이 되겠다고.”


아이는 창문 너머로 아라랏 산을 내려다보았다. 아침 햇살에 비친 아라랏 산의 웅장하고 날 선 골격이 파노라마처럼 활짝 드러나 있었다. 볼록하게 솟아오른 산봉우리를 뒤덮은 빙하에서는 푸른빛이 은은하게 빛났는데,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 페이스트리처럼 켜켜이 쌓인 곳이라는 상상만으로도 비밀스럽고 성스럽게 느껴졌다. 나무 하나 없는 산 아래에는 초록빛 초원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수십 년 전 튀르키예 정부가 활활 태워버린 상처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팬톤 컬러칩에 들어 있는 초록이란 초록이 눈 아래 펼쳐져 있었다.


“엄마, 우리 다음에는 아라랏 산 끝까지 올라가 보자!”


아이와 나는 아라랏 산을 내려다보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 도장까지 찍었다. 어느새 비행기는 으드르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는 도착 시간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튀르키예 부모님께 극적인 손주의 등장을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문 앞에 도착해 벨을 누르자 아이는 신이 났는지 입을 틀어막고는 킥킥 댔다. 어머니가 정원을 지나 대문으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마다, 우리의 심장은 쿵쾅 댔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어머니가 우리를 발견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내 손주가 왔잖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어머니는 하룬이를 보자마자 너무 놀라 울음을 터트리셨다. 그리고는 늘 그렇듯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모든 것이 어머니께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축복이었다.


짐을 끌고 울퉁불퉁한 벽돌 길을 걸으며 9년 만에 찾은 알파고의 집을 둘러보았다. 포도나무가 뽑힌 자리에 앵두나무가 훤칠하게 자라나 테라스를 가득 덮고 있었다. 현관 앞 오디나무는 바닥에 열매를 잔뜩 떨어뜨려 놓았고, 밟을 때마다 톡 하면서 진한 보라색 물이 터져 나왔다. 정원 가운데는 커다란 살구나무가 있었고, 가지 마다 연두색 살구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리고 보라색 페인트로 칠해진 집이 눈에 들어왔다. 십 년 전, 결혼식을 앞두고 시부모님께서는 남편에게 내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물으셨다. 나는 별생각 없이 ‘보라색’이라고 답했다. 처음 남편의 집 마당에 들어섰을 때, 보라색으로 집 전체가 뒤덮인 것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남편에게 “아니, 누가 보라색이라고 말한다고 진짜 보라색으로 칠해!”라고 했는데, 그 누구가 바로 우리 시부모님이었다.



세월을 정통으로 맞아 이제는 색이 연하게 바랜 보라색이 이제는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 당시 보라색이 의아하셨을 시부모님은 그때도 지금도 “네가 좋으면 우리도 좋다”고만 하신다.


우리가 으드르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아침을 먹고 짐을 풀기 시작할 때쯤, 친척들과 이웃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오랜만에 보는 아주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눈으로 더듬으며 그간의 시간을 헤아렸다. 체포 리스트에 올라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의 안부를 시작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따라잡기 위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어머님은 손님맞이로 분주해 튀르키예 홍차를 쉴 새 없이 끓여냈고, 설탕물에 절여 촉촉하고 바삭한 바클라바와 견과류를 연신 상에 올려놓았다. 둘째 고모가 말했다.


“오늘 저녁은 우리 집으로 오세요. 오늘은 특별히 한국 며느리를 위해 케밥을 준비할게요!”


도착한 첫날부터 이어진 식사 초대는 으드르를 떠나는 날까지도 계속됐다.


고모집은 으드르 시내를 벗어난 곳에 있었다. 시멘트로 지어진 단층 집들이 드문드문 거리를 지켰고, 출입문은 따로 없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집 옆에는 잡초가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공터가 있었는데, 소가 풀을 뜯으며 우리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집 뒤에는 우뚝 솟은 아라랏 산이 배경처럼 있었다. 시내에서는 건물에 가려 산봉우리만 보여 아쉬웠는데, 이곳에서 보이는 아라랏 산은 풍경화처럼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뒤로 노을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으드르는 아라랏 산 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는 곳이었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아라랏 산이 보였고,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감탄이 튀어나왔다.



우리 가족, 첫째 고모네 가족, 둘째 고모네 가족, 작은 아빠네 가족이 모이니 마당은 시끌벅적했다. 시차 적응이 안 된 터라 대화 소리, 고기 굽는 소리, 장작이 타는 소리에 정신이 어질어질했지만, 환대의 순간을 어느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마당 가운데 커다란 카펫을 가져와 깔았고, 그 옆에서 숯불에 치킨 바비큐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구워지고 있었다. 아이는 나뭇가지를 구해 화로에 넣어 불을 지피거나, 나뭇가지에 달린 불씨를 발로 밟으며 뛰어다녔다. 무아지경이었다. 서울에서는 불놀이를 꿈도 꿀 수 없었고, 가끔 떠나는 캠핑장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 싶어 잔뜩 미간에 힘을 주고 “조심해, 안돼”를 연발해야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모든 게 가능했다.



둥글게 앉아 저녁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시간이 왔다. 튀르키예 사람들에게 홍차는 ‘영혼을 치유하는 약’이나 다름없다. 아침에 일어나 정신을 말짱하게 하기 위해서도, 식후에 디저트를 먹을 때도, 빨래를 널고 휴식을 취할 때도, 독서를 할 때도, 친구를 만날 때도,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어 자꾸만 한숨이 나올 때도, 몸이 아플 때도 사람들은 차를 찾는다. 보통은 찻잎을 우려내는 상단과 생수를 끓이는 하단으로 된 차 전용 전기포트에 끓이는데, 우리가 왔다고 고모는 창고에서 세마베르(Samovar)를 꺼내왔다.


세마베르는 전통 방식으로 차를 만드는 주전자다. 세마베르 맨 아래에는 화로가 있고 장작을 가져와 불을 지핀다. 중간에는 긴 굴뚝같은 것이 달려 있는데, 이 열기가 물 주전자 중간 부분을 지나면서 물을 끓인다. 물 주전자 위에는 차 주전자가 올려져 있고, 여기에 홍차 잎을 넣고 물을 부으면 진한 찻물이 우러나온다. 이 찻물과 끓인 물을 적절하게 섞어 원하는 농도의 차를 컵에 따르면 된다. 말로 설명하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세마베르로 차를 끓여 내어 준다는 게 얼마나 큰 수고로움인지 가까이서 지켜본 본 나에게는 쾌나 뭉클했다. 세마베르 차 맛이 특별하다는 건 나도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됐다. 차에는 은은한 숯불향이 풍겼다.


보통은 차를 마시는 것까지가 손님 초대의 순서라면, 이날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튀르키예 커피를 만들어준 것이다. 튀르키예 커피는 계란만 한 작은 컵에 커피 가루를 끓여내 가루와 함께 담아주는데, 흙맛이 나고 쓴맛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커피를 마시다 실수로 바닥에 깔린 커피 가루를 먹기라도 한다면 그 씁쓸한 맛은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보통은 가스레인지에서 빠르게 끓이거나 커피 기계로 간단히 뽑아내지만, 이날은 뜨겁게 달군 모래 위에서 공들여 커피를 끓여냈다. 친척 동생은 소에서 직접 짠 우유와 설탕을 넣어 커피를 만들어 주었다. 커피 한 모금을 목에 넘겼고, 나는 신세계를 맛보았다.


“이게 정말 튀르키예 커피라고? 진짜 너무너무 맛있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지? 내가 알던 커피가 아닌데? 내 인생 최고의 커피야. 덕분에 튀르키예 커피를 다시 봤어!”


“언니, 이건 아주 느린 속도로 커피를 만들어서 그래요. 뜨거운 모래에서 커피를 끓이면 커피 주전자에 골고루 열이 가거든요. 그래서 맛이 부드럽고 깊어진 거죠.”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재운 후, 혼자 발코니에 나와 앉았다. 물론 따뜻한 홍차도 내 곁에 있었다. 한국에서, 그것도 정신없는 서울 한복판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다 보면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게 된다. 나의 하루가, 나의 시간이, 나의 삶이, 내 아이가, 내 일이 지구에서 벌어지는 그 어떠한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착각에 빠져 버린다. 내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삶이 충실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지난 9년 동안 가상의 공간처럼 자리하던 작은 으드르에서의 삶들을 마주하고 나니, 이상하리만치 비대했던 내 자아가 작아지는 것이다.


7,000km나 멀리 떨어진 땅에 머물다 9년 만에 찾아온 나와 아이를 온몸으로 환대해 주는 모습에 긴장됐던 마음이 실타래처럼 풀렸다. 나와 아이에게 튀르키예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됐다. 아라랏 산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따뜻한 홍차를 마시니 덩달아 호흡도 깊어졌다. 신기하게도 아라랏 산의 품에 안긴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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