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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예림 Oct 17. 2024

부처님을 만나는 시간

스리랑카

히카두와에서 수도 콜롬보를 거쳐 다시 캔디(Kandy)로 향했다. 스리랑카에서 불편했던 점을 한 가지 꼽자면 바로 교통이었다. 주요 도시로 가는 기차는 콜롬보를 거치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직접 이동하기에는 번거로웠다. 차로 이동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한창 고속도로가 건설되는 중이라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를 끝없이 달려야 했다. 도로에는 툭툭, 오토바이, 자전거, 승용차와 버스들이 뒤섞여 아슬아슬했다. 앞차를 추월하려고 반대편 차선을 넘나들거나, 쉴 새 없이 빵빵대는 경적 소리에 익숙해지기까지 며칠의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했다. 깜깜한 밤, 구불구불한 언덕을 넘어 캔디에 도착했다.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콜롬보처럼 뜨겁고 끈적이는 공기가 아니었다. 가을 공기처럼 습기 없는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아침에 보니 우리 숙소는 꽤 높은 곳에 있었는데 왼쪽으로는 키가 큰 나무들로 둘러싸인 파란 캔디 호수가 내려다보였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초록이 넘쳐나는 것은 스리랑카에 있는 내내 큰 기쁨이었다. 바깥 풍경을 보며 넋을 놓고 있는데, 아이가 소리쳤다.


“엄마! 조심해!!! 엄마 뒤에 원숭이!!!!”



아이의 말을 듣고도 내 머리는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원숭이들을 만질 수 있을 정도로 내 몸 가까이에서 벽을 타는 원숭이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내 머리는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아기 원숭이를 등에 업고 배수관을 오르는 원숭이들을 보며 아이와 손뼉을 치며 “정말 너무 사랑스럽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순간이었다. 원숭이 두 마리가 베란다로 폴짝 뛰어내리며 우리 쪽으로 달려들었다. 우리는 ‘으아악’ 소리를 지르며 베란다 문을 재빨리 열어 숙소 안으로 도망쳤다. 원숭이들은 우리가 떠난 베란다를 차지하고는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베란다 테이블 위에 앉아 있거나, 서로의 등털을 뽑아주기도 했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우리와 눈싸움을 하기도 했다. 아찔하고 짜릿한 아침이었다.


캔디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기 전까지 스리랑카 왕국의 수도였다.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지대에 있어 외부 세력의 침입을 막아내는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오래도록 해온 곳이다. 유럽식 건축 양식이 주를 이루는 콜롬보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높은 건물이 없는 캔디는 고즈넉하면서도 차분했다.


아침을 먹고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부처님의 치아 사리가 모셔져 있는 불치사(佛齒寺, Temple of the Sacred Tooth Relic)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불치사는 스리랑카의 불교 신자들은 물론 전 세계 불교 신자들의 방문이 이어지는 곳이기에 서두르지 않으면 사원에 들어가는 것조차 어렵다고 했다. 불치사는 하루에 딱 세 번, 치아 사리를 담은 황금 상자를 대중에게 공개한다.


나는 부처님을 떠올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부처님은 나와는 급이 다른, 저 멀고 넓은 우주의 고귀한 존재일 것이라고 말이다. 생각의 꼬리를 물다 보면 부처님은 처음부터 나와는 다른 존재이기에 내가 아무리 애를 쓴들 부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그런데 부처님의 어금니가 실제로 남아 있다니. 어금니의 존재는 부처님도 나처럼 인간이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나도 부처님처럼 마음을 갈고닦으면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부처님의 어금니는 단순히 성인의 신체 일부가 아니었다. 나에게는 인생을 먼저 살다 간 선배 인간의 희망이자 위로였다.


신발을 벗고 무릎을 덮는 옷을 두른 후, 사원에 들어갔다. 우리는 곧장 향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아침 9시가 되자 예배실은 황금 사리함을 보려는 사람들로 하나둘 차기 시작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깨끗한 민무늬의 하얀색 옷을 입었고, 손에는 연꽃이나 진한 향을 풍기는 프랑지파니를 손에 들고 있었다.



사리함이 모셔져 있는 향실 앞에는 나무로 된 길고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앞에 서서 기도를 올리며 꽃과 향을 바쳤다. 꽃은 줄기째 올리지 않고 꽃잎을 하나하나 떼어내거나 줄 지어 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향실 오른쪽으로는 긴 줄이 이어져 있었는데, 사리함을 직접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 줄은 1층 출입문까지 이어졌다. 노인, 임산부, 영유아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사리함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법문을 읽거나 기도를 올렸다. 나와 아이도 사람들 틈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만히 사람들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9시 30분이 되자, 한 스님이 향실 앞으로 나와 불교 문구를 읊기 시작했다. 그 후 다른 스님들이 꽁꽁 싸매어졌던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사리함의 뚜껑을 열었다. 황금 치아 사리함이 공개된 순간엔 공기의 흐름마저도 멈춘 듯싶었다. 황금이 사방을 감싸고 있고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로 둘러싸인 사리함은 조명을 받아 태양처럼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사리함 앞에서 가슴 앞에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여 기도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신도들과 여행객들로 꽉꽉 들어차 이동조차 쉽지 않았지만, 누구 하나 큰 소리로 떠들지 않았다. 이 경건한 순간을 가슴 깊이 느끼고 있던 게 분명했다.



나는 눈을 들어 절을 둘러보았다. 높은 천장은 뻥 뚫려 있고, 그 사이로 햇볕 몇 가닥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나무 기둥들이 보였다. 사람들이 봉양한 밥과 떡을 먹으려는 작은 새들의 지저귐도 들려왔는데, 새들이 잠시 쉬어가며 배를 불리고 목을 축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아이도 조용히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불치사의 인기는 스리랑카가 겪은 핍박의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스리랑카는 세 나라의 식민 지배를 받아 왔다. 가장 먼저 도착한 포르투갈은 가톨릭을 퍼트리기 위해 불교를 억압했다. 불교 사원을 불태워 버렸고, 개종을 거부한 승려들을 악어가 바글거리는 강물에 던져 버렸다. 사원에 있던 물건과 식량은 가톨릭 선교에 사용한다며 빼앗겼다.


온갖 핍박과 어려움을 겪는 중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한 가지가 바로 부처님의 치아 사리였다. 승려들은 알고 있었다. 부처님의 치아마저 빼앗기면, 스리랑카 사람들의 정신마저 굴복당하게 될 거라는 점을 말이다. 치아 사리는 스리랑카 전국을 떠돌다 이곳 불치사에 왔다.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치아 사리를 지켜낸 것이다.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치아 사리는 식민지의 굴욕을 이겨낸 저항의 상징이자 부처님 그 자체였다.


사리함이 열리면 1층에서는 연주가 시작된다. 드럼통처럼 생긴 다올라는 장구를 두드리듯 양 옆을 두드려 깊고 울림 있는 소리를 냈고, 탐마탐은 두 개의 드럼이 붙어 있는데 호미처럼 안쪽으로 말린 스틱으로 힘차게 내리쳐 날카로운 소리를 만들었다. 태평소를 닮은 호라네는 입을 복어처럼 부풀려 불어냈다. 높은 천장을 웅장하게 채운 연주 소리는 마치 화살 같았다. 날카롭고 묵직한 화살들이 날아와 내 몸, 내 마음, 내 머리에 박히는 듯했다. 맑고 또렷한 정신으로 살아가라는 부처님의 말씀 같았다.



“엄마, 근데 식민지는 언제 시작했어?”

“식민지는 도대체 왜 만드는 거야? “

“왜 사람들을 자꾸만 괴롭히는 거야?”


우리는 불치사 본당을 빠져나와 넓은 정원으로 나왔다. 정원 한가운데에는 사방이 뚫린 커다란 본전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이는 스리랑카에 와서 부쩍 식민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이의 질문은 스리랑카의 식민 역사를 시작으로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를 넘어 식민 지배가 지금의 우리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까지 이어졌다.


“식민지가 시작된 건 결국 욕심 때문이지.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나 일본처럼 힘이 셌던 나라들은 더 힘을 키우고, 더 부자가 되고 싶었어. 그래서 배를 타고 다른 대륙으로 가서 그 땅에서 자라는 곡식과 사람들을 자기 것처럼 함부로 사용했어. 더 많이 가지고 싶어서 서로 전쟁도 일으켰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가서 일했잖아. 유튜브에서 봤어.”


“맞아. 그때는 한국 사람들이 일본말을 배워야 했어. 스리랑카 사람들도 영어를 쓰고 있지? 그건 영국 식민지 때문이야. 식민지를 하면 원래 살았던 사람들의 말과 종교도 빼앗아 버리거든. 정말 잘못된 거지. 말이 통해야 사람들을 더 쉽게 이용할 수 있으니까. 근데 지금도 봐바. 잘 사는 나라와 잘 살지 못하는 나라를. 우리나라는 기적처럼 잘 사는 나라가 됐지만, 식민 지배를 당했던 나라들 대부분은 여전히 가난해. 식민지에서 독립을 하긴 했지만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는 못한 거나 다름없어.”


신발 착용은 금지된 불치사. 새똥을 밟고는 잠시 우울했다.


남편은 휴지에서 작고 하얀 아이의 앞니를 꺼냈다. 스리랑카 여행 중에 아랫니 하나가 빠져 소중하게 품고 다니던 것이었다. 남편은 아이의 손을 잡고 정원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남편 엄지손톱의 1/8도 안 되는 작고 작은 이를 정원에 묻었다. 한국에서는 없는 문화이지만, 남편의 고향인 튀르키예에서는 아이의 이가 빠지면 존경하는 사람의 정원에 찾아가 이를 묻는 문화가 있다. 아이가 그 사람을 닮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스리랑카에서 빠진 아이의 이를 부처님의 이가 모셔진 불치사에 심게 되다니, 참으로 감동스러웠다. 남편이 작게 소곤거렸다.


“하룬이가 부처님처럼 ‘평화’를 위해 기여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아멘.”


불치사를 나와 캔디 호수를 따라 걸었다. 아이는 팝콘을 사서 호수를 떠다니는 오리들에게 먹이를 주었다. 어느새 스리랑카 누나가 하룬이 옆에 다가와 함께 먹이를 던져 주고 있었다. 그 누나는 팝콘을 더 사와 아이의 손을 잡고, 옆에 와있는 원숭이에게도 먹이를 주었다. 아침부터 원숭이를 보고 화들짝 놀란 터라 처음에는 잔뜩 겁을 먹어 주춤했지만, 누나의 용기에 힘입어 원숭이들에게도 다가갈 수 있었다.



평화로웠다. 뭐하나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는 시간이었다. 부처님의 마음을 따르는 나라여서 그랬을까. 스리랑카는 조용히, 그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떠나려는 마음이 이토록 아쉬웠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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