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우리가 머물던 숙소는 해변 반대쪽으로 15분 정도 걸어야 하는 곳에 있었다. 히카두와의 메인 도로는 여행객들을 태운 툭툭과 오토바이가 쌩쌩지나는 탓에 발끝까지 빳빳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식당에서 쿵쾅거리며 흘러나오는 미국 팝 음악 탓에 간단한 대화도 소리를 질러야 할 지경이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도망치듯 반대편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길 오른 편에는 초록색 인조 잔디가 깔린 크리켓 구장이 보였다. 선수들의 힘찬 기합 소리와 응원단의 함성이 골목에 드문드문 울려 퍼졌다 사라졌다. 그 옆에는 독일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는 유치원이 하나 있었고 마침 경쾌한 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를 따라 골목을 걷다 보니, 낮은 집들 사이에 하얀색 페인트를 칠한 숙소가 나타났다. 자갈이 깔린 정원을 지나 좁은 문을 통과하자, 열대 식물들이 빽빽하게 둘러싸인 조용한 공간이 나왔다. 숙소 아저씨가 미소를 띄며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숙소 아저씨는 자신을 ‘기’라고 소개했다. 기 아저씨는 대부분의 스리랑카 남자들처럼 군살 하나 없는 길쭉길쭉한 팔 다리를 가졌고, 하얗고 고른 치아가 돋보였다. 인자하고 여유로운 인상이었다. 아저씨는 방을 하나씩 보여주시며 우리가 원하는 방을 고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아이는 문을 열면 수영장으로 뛰어들 수 있는 1층 방을 골랐다.
방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방 가운데에 달린 노란 조명을 켜자 손바닥만한 갈색 꽃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금색 커튼이 보였다. 체리색 옷장과 침대는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이 집이 숙소로 사용 되기 전, 누군가의 손을 탔던 사연 있는 물건이었을 것이다. 화장실에는 검지 손가락 길이의 도마뱀 두 마리가 변기 위 천장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다.
저녁 밥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과일 가게에 들렀다. 굵직한 망고스틴 여덟 알과 애플 수박 한 덩이를 골라 기 아저씨께 함께 먹자고 여쭈었다. 아저씨가 앉으니, 숙소를 돌아다니던 누런 강아지도 옆에 와 앉았다. 아저씨는 스리랑카의 젊은이들이 한국으로 돈을 벌러 많이 떠나고 있다며, 한국은 좋은 나라인 것 같다고 입을 여셨다.
부끄럽게도 내가 스리랑카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인도 아래에 있어서 ‘인도의 눈물’이라 불린다는 것과 2000년대 초반에 KBS 폭소클럽에서 어깨뽕이 잔뜩 들어간 굵직한 체크 무늬 양복을 입은 개그맨 정철규씨가 나와 “안녕하세요. 저는 스리랑카에서 온 외국인노동자 블랑카입니다. 사장님 나빠요.”라는 대사를 들으며 컸다는 기억뿐이었다. 당시 그 개그를 보며 한국에 있는 이주노동자의 삶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일까? 아니, 우리나라가 이주노동자들에게 살기 좋은 나라일까? 한국에 거주하는 2만 명의 스리랑카 이주민들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가파른 계급의 벽에 대해 기 아저씨께 솔직히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머쓱한 마음이 들어 아저씨께 이것저것 여쭈었다. 고향은 어디신지, 가족들은 모두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자녀분들은 어떤 일을 하시는지, 마지막 휴가는 언제 가셨는지, 스리랑카에서 놀러갈 만한 곳은 어디인지 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여쭈었다.
“그럼, 아저씨는 언제부터 여기에서 일하신 거예요?”
“전 원래 요리사였어요. 20년 가까이 호텔에서 음식을 만들었어요. 히카두와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바닷가 도시 갈레(Galle)가 나와요. 거기에서 일을 했었어요. 그런데 2004년 쓰나미가 호텔을 쓸어가 버려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나와 아이의 눈과 귀가 커졌다. 2004년 인도양 쓰나미라면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2017년 남편과 함께 쓰나미의 최대 피해 지역인 인도네시아 아체(Ache)로 봉사활동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당시 아체에서 규모 9.1의 지진이 발생했고, 이후 아파트 11층 높이의 대형 쓰나미가 몰려와 17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 처참하고 잔인한 자연 재해였다. 이 지진은 주변 국가들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대륙을 넘어 저 멀리 아프리카 일부 국가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것을 뉴스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두 번째로 피해가 컸던 나라가 스리랑카였다는 사실은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알게 됐다. 당시 스리랑카 남부 해안 도시에서 35,000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아저씨는 인도양 쓰나미의 생존자였다.
“아침 9시쯤 호텔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게 처음엔 뭔지 몰랐어요. 저게 뭘까 잠시 서서 생각하고 있었죠. 그러다 갑자기 그게 거대한 벽 같은 높은 파도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순간, 죽을 힘을 다해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어요. 처음 보는 쓰나미 앞에서 뭘 해야할지 몰라 한참을 우왕좌왕했어요. 정말 아무 생각이 나지 않더라고요. 곧 쓰나미가 호텔을 완전히 삼켜버렸어요. 얼마나 깊은 곳까지 휩쓸렸는지는 모르겠어요. 간신히 물 위로 올라와서 문짝 같은 걸 잡고 버텼어요. 그 문짝이 아니었다면 아마 제 목숨도 거기서 끝이었을 거예요.”
아저씨가 겪었을 공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팔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저씨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파도가 밀려왔어요. 그때도 운 좋게 휩쓸리지 않았어요.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려 가고, 자동차와 배가 여기저기 떠다니는 걸 보면서 곧 내 차례가 오겠구나 생각했어요. 파도가 몰아친 지 세 시간쯤 지났을 때 됐을 구조대가 도착했어요. 손발에 힘이 다 빠져서 이제는 정말 버틸 수 없겠구나 생각할 때였어요. 저는 곧바로 병원으로 실려 갔고, 쓰나미로 목과 허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어요. 3개월 동안 병원에 있었어요. 죽었다 살아 났어요.”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기 아저씨의 목이 불편해 보였다. 아저씨가 움직일 때 목이 몸통과 한 방향으로 움직였지만, 따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 자연재해에 관심이 많던 아이는 쓰나미에서 살아난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는 밤늦게까지 질문을 퍼부었다. 스리랑카의 피해 규모가 컸던만큼, 박물관이나 위령탑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 검색을 시작했다. 마침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역 쓰나미 교육 센터 & 박물관(Community Tsunami Education Center & Museum)’이 있었다. 내일은 아이와 함께 이곳을 방문하기로 마음 먹었다.
쓰나미 교육센터는 히카두와 관광지에서 30분 이상 떨어진 곳에 있었다. 당시 쓰나미가 스리랑카에 미쳤던 영향을 생각하면, 이 공간은 무척이나 아담했다. 비교적 외진 곳에 있었지만, 우리가 머무는 짧은 시간 안에도 서너 팀이 연달아 방문을 했다.
교육센터는 세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첫 번째 공간은 2004년 인도양 쓰나미의 발생 원인을 지질학적으로 설명하는 곳이었다. 가운데 책상 위에는 지구과학 시간에서나 봤을 법한 지구 모형이 놓여 있었고, 벽에는 당시 엄청났던 지진의 규모와 판의 경계가 어떻게 끊어졌는지를 설명하는 자료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특히 눈을 띄는 두 장의 사진이 있었다. 하나는 저 멀리 파도 같은 것이 보이는 장면이었는데, 바닷물이 순식간에 갈라진 지각 사이로 빠지면서 훤히 드러난 해변에서 사람들이 정신없이 물고기와 조개를 줍는 모습이었다. 다른 한 장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걸 뒤늦게 알아채고는 허둥지둥 육지로 도망치는 장면이었다. 이 사진들은 단 몇 분 사이에 연속으로 찍힌 것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휴가를 내고 가족들과 꿈같은 시간을 보내다 마주한 악몽을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지고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문제는 2004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새롭게 판이 갈라지면서 앞으로 이 지역에 크고 작은 지진이 발생할 거라는 우울한 예측이었다.
두 번째 공간은 차마 눈으로 보기 어려웠다. 쓰나미가 가져온 파괴적인 결과를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쪽 벽에는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생생하게 담은 사진들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커튼을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아 짧게 기도를 마치고 공간을 빠져 나왔다. 마지막 공간은 쓰나미로 고아가 된 아이들이 그림 치료를 받는 곳이었다. 그 옆에는 세계 곳곳에서 위로의 마음을 담아 보낸 선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교육 센터 옆에는 빈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1층에는 녹슬고 찌그러진 채 영원히 멈춰버린 기차 ‘퀸 오브 더 시(Queen of the Sea)’가 있었다. 섬뜩하고 으시시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이 기차는 우리가 히카두와로 올 때 타고 왔던 바로 그 철로를 달리던 기차였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아침, 기차는 콜롬보를 떠나 갈레로 향하고 있었고, 기차에는 휴가를 맞아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로 꽉꽉 차 있었다. 첫 번째 파도가 쳤을 때 열차 몇 칸이 탈선 했고, 두 번째 파도가 덮쳤을 땐 열차가 전복되면서 1,7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희생자 중에는 어린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퀸 오브 더 시’는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뚜렷하게 보여주는 증거물이었다.
2017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끝자락에 달린 아체를 방문했다. 인도네시아 친구는 지진과 쓰나미로 엉망진창이 됐었던 록가(Lhoknga) 해변으로 데려갔다. 해변가는 고요했고, 에메랄드빛 바다에는 잔잔한 파도가 살짝살짝 해변을 치고 있었다. 해변에는 큰 야자수들이 꼿꼿하게 자라 그늘을 만들었고, 다시 여행객들이 찾아오는지 썬베드와 파라솔도 자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멀쩡했다.
아이와 수영을 하던 스리랑카의 히카두와 해변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평화로웠다. 기차는 여전히 해안 철로를 달리고, 여행객들은 휴가를 맞아 바다를 찾았다. 쓰나미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여전히 살아내고 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곳에서도 다시 삶을 꾸려내는 용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기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재난의 흔적들을 눈으로 살펴보며 섬나라 사람들의 삶과 운명을 조금이나마 가까이 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기 아저씨의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에 묵직하게 남아 있다. 아이는 친구들에게 아저씨가 쓰나미에서 살아 남은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들려주거나, 아저씨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 벽에 걸어 두었다.
히카두와를 떠나는 아침, 버스를 타기 전 아이와 동네 빵집을 찾았다. 아저씨께 드릴 빵을 골랐다. 작게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우리는 기 아저씨가 숙소를 관리하느라 3년 동안이나 방문하지 못했던 아저씨의 고향, 캔디(Kandy)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