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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예림 Oct 14. 2024

진짜 자유를 만나는 법

스리랑카

칼날 같은 서울의 겨울바람을 뒤로하고, 뜨끈한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코를 킁킁 대며 코 속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입국 수속을 밟으러 가는 동안, 냄새부터 확인하는 건 나의 여행 습관 중 하나다. 나라마다 독특한 냄새가 떠다니기 때문이다. 내 여행은 비행기 탑승이 아니라 낯선 냄새를 자각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콜롬보 공항에는 절에서 풍길 법한 은은한 허브 향이 공간을 얇게 채우고 있었다. 불교의 나라다운 향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숙소 지배인이 추천한 골목 식당으로 걸어갔다. 식당 앞은 아침 식사를 구매하려는 직장인들로 길게 줄이 이어져 있었다. 덜렁거리는 실링팬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끈적이는 메뉴판을 빠르게 훑었다. 뿌연 진열대 안에는 갓 튀겨 기름을 잔뜩 머금은 빵들이 종류별로 전시되어 있었다. 아이와 나는 빵 세 개, 초코우유, 밀크티를 주문하고 2,400원을 건넸다. 이렇게 인심 넘치는 나라가 있다니. 밀크티는 많이 주다 못해 접시에까지 흘러넘치고 있었다.



아이는 아침을 먹던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 왔다. 그러고는 손으로 빵을 잡아 입에 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인도네시아에서 살았을 때 친구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멀쩡한 수저와 포크를 놔두고 손가락으로 음식을 떠먹는 게 조금은 미개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를 나의 거만함을 깨닫게 해준 말이었다. 


“있잖다, 이렇게 한 번 해봐. 손으로 음식을 뜨잖아? 그러면 네 몸이 먼저 알아차리고 맛있게 먹을 준비를 하거든.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될 거야.” 


친구의 말은 맞았다. 음식의 온도, 무게, 색, 촉감을 미세하게 느끼며 손으로 입에 넣을 때 음식의 맛은 훨씬 더 풍부해졌다. 아이의 적응력은 놀라운 것이어서 미끄덩거리고 카레 향이 풍기는 손가락 따위는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배를 두둑하게 하고는 콜롬보 기차역으로 향했다. 스리랑카에 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거북이와 함께 수영하기’였다. 수족관에서만 볼 수 있던 거북이와 바다에서 헤엄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싶은 마음이었다. 거북이를 만나려면 콜롬보에서 기차를 타고 스리랑카 서남부에 있는 히카두와(Hikaduwa)로 가야 했다. 쉴 새 없이 울려대는 툭툭의 경적 소리, 사람이 지나가도 조금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오토바이 행렬, 과일과 음료수를 파는 상인들의 휘파람 소리로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간신히 역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드높은 지붕과 복잡한 철제 구조가 한눈에 가득 담겼다. 플랫폼을 덮고 있는 은색 철재 지붕은 빗물에 부식돼 드문드문 조각이 떨어져 나가 있었고, 강렬한 햇빛을 이기지 못한 페인트도 물이 빠져 아날로그 감성을 풍겼다. 이곳은 스리랑카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시절, 차와 커피 같은 상품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옮기기 위해 건설됐다. 영국인들은 스리랑카의 자원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빼앗기 위해 철도를 촘촘히 놓았고, 1948년 2월 4일 스리랑카가 독립할 때까지 스리랑카의 물자를 아낌없이 빼내어 갔다. 그들이 빼앗은 것은 물건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스라링카 사람들의 자존심과 꿈마저 앗아 갔을 것이었다. 식민지 시절의 모습을 한참 그리고 있을 때, 플랫폼에 기차가 도착했다. 열차에 오르려고 뛰어가는 사람들 틈 속을 아이와 함께 뛰어들었다.



기차는 바다 옆에 바싹 붙어 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가까이 달린다고?’ 싶을 만큼 가까웠다. 기차에서 뛰어내리면 그대로 바다에 풍덩 빠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기에 마치 바다 위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출렁이는 파도 위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물별들이 끊임없이 걸려 있다 사라지곤 했다. 기차는 천천히 달려 나갔고, 세 시간 반이 지났을 때 히카두와에 도착했다.


드디어 거북이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우리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안경과 고프로를 챙겼다. 아이가 거북이와 헤엄치는 감동적인 순간을 영상으로 남겨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거북이와 눈을 마주치며 수영할 생각에 아침부터 속이 울렁거리고 간질거렸다. 수족관에서 자유가 묶인 채 살아가는 거북이를 마주하는 건 늘 괴로운 일이었다. 자유롭게 헤엄치는 거북이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숙소에서 거북이 해변까지 15분을 걸었다. 현지인이 운영하는 작은 숙소를 이용하겠다고 마음을 먹었기에, 애초에 해변가 앞을 차지한 크고 말끔한 리조트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구글 지도에서는 거북이 해변이 분명 이쯤 어디라고 안내하고 있었는데, 도무지 해변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건물 사이로 들어서면 막다른 길이 나오고, 또 다른 틈을 찾아 들어서도 문으로 막혀 있었다. 리조트는 숙박하지 않는 외부인들의 출입을 철저하게 막아서고 있었다. 거북이를 만나기 위해서 좁은 골목을 하루 종일 찾아 헤매야할 것 같은 비참한 기분이었다. 겨우 발견한 통로는 폭이 1m 밖에 되지 않는 좁은 길이었다. 풍선처럼 부풀었던 마음이 점점 쪼그라들었다. 우리는 거북이를 만나러 온 것이니, 거북이만 만나면 분명 이 쪼그라든 마음이 다림질하듯 활짝 펴질 거라며 차오르던 화를 꾹꾹 눌러댔다.



골목을 빠져나온 아이는 냅다 바다로 뛰어갔다. 나도 아이를 따라 골목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거 뭔가 이상한데?’라는 생각이 든 건 모래사장에 첫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앞서 갔던 아이는 바다로 들어가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이의 시선은 바다 한가운데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향해 있었다. ‘아, 저기가 바로 그곳이구나’ 싶어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바닷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종아리에 닿을락 말락 한 높이에서 한눈에 보기에도 큰 거북이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거북이들은 사람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는 쇠 막대기로 고정한 낡은 팻말이 위태롭게 서 있었다. 팻말에는 '<친환경적인 거북이 여행(Eco-Friendly Turtle Trip)>'이라며 거북이 관찰 수칙 네 가지가 적혀 있었다. 하나, 최소 1m 이상의 거리를 유지할 것. 둘, 거북이를 만지지 말 것. 셋, 괴롭히거나 둘러싸지 말 것. 넷, 잡거나 물 밖으로 꺼내지 말 것. 팻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이 수칙을 지키는 여행객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먹이를 주면서 거북이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고, 거북이들은 먹이를 얻어 내려고 딱딱한 등껍질로 서로를 밀쳐냈다. 몇몇은 거북이 머리와 등껍질을 만지거나 툭툭 치면서 괴롭혔고, 힘을 써 거북이를 물 위로 들어 올리려는 어린이도 있었다. 해변에는 거북이 먹이를 파는 아저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행객이었다. 정확히는 우리 빼고 모두 하얀 피부를 가진 백인들이었다.


“엄마, 나 가고 싶어.”



거북이 해변, 거북이 해변 노래를 부르던 아이를 위해 떠난 여행이었기에 단박에 포기하기가 어려웠다. 한 번 더 시도해보고 싶었다. 다시 아이의 손을 잡고 바다에 들어가 거북이를 보자고 했지만, 아이는 겁에 질려 있었다. 결국 거리를 두고 거북이를 지켜보는 것으로 간신히 합의를 하고 물속에 들어갔지만, 거북이들은 우리가 먹이를 던져줄까 싶어 자꾸만 돌진했다. 이곳의 거북이들이 나와 자유롭게 헤엄칠 만큼 평화롭지 않다는 것을 아이도 알아챈 듯싶었다. 먹이가 없다는 것을 알면 곧장 나를 떠나 다른 사람에게 가버릴 거라는 것을 말이다. ‘거북이와 헤엄치기’는 싱겁게 끝났다. 동물의 자유를 지지한다는 것은 동물과 인간이 철저하게 각자의 영역을 지켜주는 거리 두기에 있다는 교훈을 깨달은 시간이었다.


숙소에 돌아와 숨을 고르며 매니저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싱겁게 끝나버린 거북이 해변에 대해 그리고 아이와 마음껏 뛰어놀아도 좋을 해변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거기에 여행객들이 찾지 않는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야심 찬 조건도 덧붙였다. 아저씨는 금세 한 해변을 떠올렸다. 이곳에서 툭툭을 타고 30분을 달려야 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다시 짐을 챙겨 그곳으로 출발했다. 목적지는 이름마저 아름다운 ‘아쿠랄라(Akurala) 해변’이었다.


툭툭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에 바다가 있었다. 건물 없이 툭 터진 바다는 모두의 것이었다. 돈을 주고 빌려야 하는 파라솔과 선베드도 없었고, 그늘을 만들어주는 멋드러진 야자수도 없었고, 고운 모래가 아닌 굵은 모래가 서걱서걱 밟히는 바다였지만, 이방인은 우리뿐인 스리랑카 사람들의 바다였다. 시끄러운 음악이 머리를 어지럽힐 일도, 간식을 구매하라고 눈치 주는 상인들도 없었다. 작은 우산을 그늘 삼아 아이의 물놀이를 바라보았다. 잔잔한 파도만큼이나 잔잔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이가 모래놀이를 시작하자, 한 스리랑카 꼬마가 곁에 다가와 함께 모래를 열심히 파내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서로의 눈을 보며 속도를 맞춰갔다. 모래성을 만들다 꼬마가 바다로 뛰어가면, 내 아이도 바다로 뛰어들었다. 내가 앉아 있던 자리 옆에는 한 무리의 스리랑카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아이가 물속에서 놀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아이 곁으로 다가가 주었다. 양손을 잡고 아이가 발차기를 하도록 끌어당겨 주거나, 물이 깊어져도 괜찮다고 다독여 주었다. 손가락으로 코를 막고 잠수를 하는 법이나, 손으로 물고기를 잡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아이를 지켜보던 나에게 그 스리랑카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제가 아이를 지켜보고 있으니, 걱정 말아요(Madam, I am watching his safety)!”


아이는 가끔씩 내 얼굴을 살피기도 했지만, 물놀이에 빠져 더 이상은 나를 찾지 않았다. 나도 따뜻한 모래에 양 발을 넣고, 햇볕에 지친 마음을 마음껏 말려냈다.


“엄마! 나도 스리랑카 삼촌처럼 뛰어서 물에 들어가 볼래!”


물속에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웠던 모양이다. 아쿠랄라 해변에 도착한 후에도 한동안 나와 아이는 뭔가에 얽매인 것처럼 부자연스러웠지만, 스리랑카 사람들은 거침이 없었다. 아이는 "엄마, 봐바!"라고 외치며 내 뒤로 열 발자국쯤 걸어가더니, 있는 힘을 다해 바다로 내달렸다. 양팔은 허공을 퍼덕였고, 작은 발은 가볍고 경쾌했다. 작은 새 한 마리가 첫 비행을 시도하는 것 같았다. 아이는 그대로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더니, 머리를 물속에 넣고 작은 팔과 다리를 저으며 그 삼촌에게 헤엄쳐갔다. 아이 스스로가 껍질을 깨고 새로운 세상으로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내 몸의 어딘가에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뜨거운 무언가가 톡 하고 터지며 온몸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아이의 몸과 마음에 ‘자유로움’이 새겨진 날이었다.


물은 맑게 반짝였고, 하늘은 노릇노릇하게 구워질 참이었다. 폴 오스터의《빵 굽는 타자기》에 나온 글이 떠올랐다.


'지평선이 사방으로 훤히 트였다. 나는 어느 쪽으로든 마음대로 걸어갈 수 있었다. 가벼운 차림으로 여행한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갈 수 있었다. 두 다리만 버텨 준다면 그 어떤 것도 나를 막을 수 없을 터였다.'



딱 이 마음이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돌아갈 툭툭이 잡히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해질 무렵, 버스 한 대가 빵빵거리며 정류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놓칠까봐 손을 잡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300원짜리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완벽하게 멈추는 법이 없었기에 요령껏 올라타야 했다. 사방으로 열린 창문에선 짭짤한 바다 바람이 쏟아졌고, 신나는 스리랑카 가요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앞문과 뒷문은 닫히는 법이 없었기에 드넓은 바다를, 보랏빛 노을을 마음껏 눈과 마음에 주어 담았다. 바람은 시원해 더운 줄 몰랐고, 윤하룬은 코를 골며 골아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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