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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그다드Cafe Jun 27. 2024

보약(補藥)의 경제학

정관장과 장어 그리고 한의원

불혹(不惑): 나이 사십을 이르는 말로, 이는 공자가 나이 사십에 이르러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여 붙여진 말.


때아닌 나이 논란이 많다. 윤석열 나이(만 나이), 세는 나이, 연 나이 등등. 이유는 많겠지만 어떻게든 어리게 보이고자 하는 대중의 욕망이 만들어낸 논란이 아닌가싶다. 하지만 나에게는 나이가 더이상 큰 의미가 없다. 1984년 생으로 6월 9일 기준 생일은 이미 지나다보니, 윤석열 나이로는 40살, 연 나이로도 40살, 세는 나이로는 무려 41살이기 때문이다. 빼박 40살.


나이 마흔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수두룩백백, 차고 넘치지만 이 지면의 주제는 나이가 아니기 때문에, 포커스를 살짝 다른 곳에 맞추자고 한다. 공자님은 나이 마흔에 이르러 세상의 어건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는데, 나는 반대로 나이 마흔에 온갖 유혹에 넘어가는 경지에 도달했다. 내가 넘어간 유혹들만 하더라도 과식의 유혹, 과음의 유혹, 군것질의 유혹, 게으름의 유혹, 나태의 유혹...


휴...(진짜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다 적을 수도 없을 만큼 유혹에 취약한 존재가 바로 나이만 마흔 먹은 초라한 나이다.


앞에 언급한 모든 유혹들에 하나하나 다 넘어가서, 살은 2년 전 대비 한 10킬로그램 찐 거 같고, 반대로 체력은 30킬로그램쯤 빠져버린거 같다. 아예 체력이라고 불릴 만한 녀석이 나에게는 이제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내체력... 어디갔니...)


살찌고 체력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래야 볼 수 없는 나를 가엽게 여긴 분이 있으니... 바로 한 분 밖에 없는 나의 장모님.


장모님께서 큰 맘 먹으시고는, 사위(나)를 데리고 단골 한약방 가셔서는 보약(補藥)을 의뢰하셨다. (장모님! 감사합니다!) 사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보약이 필요 없는 몸이었다. 그 왜 회사 부서에 꼭 한 두명 있지 않나? 새벽까지 술 마셔도 다음 날 한 시간 일찍 나와서 자리 지키는 사람. 술 잘 먹는 걸로 회사 생활 하는 캐릭터. 그 캐릭터가 바로 나였다. 그 만큼 체력에는 자신 있었다. 체력이 나였고, 내가 체력인, 그런 체력과 혼연일체된 상태.


하지만 지금은... 앞서 설명했듯이 체력은 0 이며, 배는 동그랗게 튀어나오고, 첫째이자 늦둥이인 Hoya(글쓴이 아들)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그런 마흔 아저씨일 뿐이다. (그렇다고 회사일을 잘 하는 것도 아니다)

장모님을 쫄래쫄래 따라, 장모님 단골 한의원으로 가서 접수를 하고, 한의사 선생님을 뵈었다. 간단하게 내 상태에 대해서 들으시고는, 맥을 신중하게 짚으셨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말하시길,


"맥이 떨어졌네요."


맥이 떨어졌다는 말이 숨이 떨어졌다는 말처럼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네? 혹시... 저 어디 아픈가요? 많이 안좋은가요?"


"만성피로입이다. 혹시 술 많이 마시죠?"


나는 궁색한 표정으로...


"안 마시려고 노력하지만... 회사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의사 선생님은 연이어 뻔한 질문을 했다.


"커피 많이 드시죠?"


"네..."


"운동 정기적으로 하시나요?"


"아니오...(실은 못합니다)"


그리고 추가로 질의응답이 이어졌고, 한달 분의 보약 섭취 판정이 떨어졌다. (이미 장모님과 한의사 선생님 간의 거래가 몇 일 전에 완료 된 것으로 안다)


그리고 끝으로 한의사 선생님께서 덧붙이길,


"약 먹는 동안 술, 고기, 밀가루, 카페인, 찬 음식은 피하시고, 마음 편히 먹고 스트레스 안 받는 게 중요합니다."


아니! 이게 무슨 당연한 말 대잔치인가. 술, 고기, 밀가루, 카페인, 찬 음식 피하고, 스트레스 안 받으면 보약이 무슨 필요인가! 보약 안 먹어도, 집나간 맥이 다시 돌아올 것 같은데... 그래도 장모님의 단골가게 한의원임을 고려하여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그래도 직장인이라 말씀하신 거 다 지키기가 어려울 거 같습니다만...."


한의사 선생님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최대한 해보시고, 술 많이 마시는 날은 약발이 떨어지니 그냥 술만 마시고 보약은 마시지 마세요." 라고 명쾌하게 처방해주셨다.


한의원에 나와서 다시 장모님과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 받았다.


장모님께서는 저 한의원이 이 동네 노인들한테 아주 유명하다고, 약발이 잘 받는다고 칭찬하셨다. 장모님 판단으로는 프리미엄 녹용을 써서 그런 거 같다고 조심스레 추측하셨다.


나이 마흔에 프리미엄 녹용 보약이라... 불현듯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는 어렸을 때 기억이 별로 없다. 나는 다 그런줄 알았는데, 아내는 비교적 어렸을 때(본인 주장으로는 5살 때 기억도 난다고 하는데, 5살은 좀 심하지 않나 내심 생각해보지만) 기억이 선명한 것처럼 보여, 기억에도 편차가 있구나하고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나도 9살 이후 그러니깐 초등학교 2학년 이후부터는 꽤 기억이 선명한 편이다.


아버지와 나는 30살 차이가 나니깐 거의 아버지가 마흔 정도였을 때 인 것 같다. 아버지는 육체 노동자로 평생 일했다. 커리어의 대부분을 공장의 생산직에서 일하셨기 때문에 체력 소모가 컸을 것이다. 한여름 보다 오히려 6월에서 7월 초여름을 힘겨워 하셨던 기억이 있다.


그 때도 여름 초입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어느 날 퇴근하시면서 커다란 파란 봉지를 함께 가지고 오셨다. 어린 마음에 동생과 나는 처음 보는 파란 봉지를 신기한 듯 들어보았고, 깜짝 놀라 다시 봉지를 놓아버렸다. 봉지 안에는 복수의 힘 있는 생명체 여럿이 힘차게 펄떡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놀란 동생과 나를 보며 아버지가 싱긋 웃으셨던 것 같다.


파란 봉지 안에는 바다장어가 들어가 있었다. 아버지는 어디서 들으셨는지, 장어를 고아 먹으면 체력 증진에 효과가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육체 노동자로 여름을 버티기 위해, 부산 기장 앞바다의 어시장까지 버스타고 가서 장어를 구매한 뒤 파란 봉지에 담아, 다시 버스타고 집까지 왔을 것이다. 궁금해진다. 버스에서 그 펄떡이는 장어가 담긴 파란 봉지를 쥐고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당시에는 이미 엄마가 집을 나가고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직접 커다란 누런 양은솥(?)에다가 장어를 담아 꽤 오랫동안 고으셨다. (할머니가 같이 살면서 동생과 나를 돌봐주셨지만, 장어를 다루기에는 벅차하셔서 아버지가 직접 고으신 기억이 있다) 5시간 이상 족히 고은 장어 국물은 뽀앴고, 채 녹지 못한 장어 가죽이 몇 점 둥둥 떠다녔다. 아버지는 장어 고은 국물에 밥도 말아 드시고, 때로는 훌훌 국물만 드셨다. 동생과 나에게도 권했지만, 너무 비려서 잘 먹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일 때문에 샀던 보약 얘기도 여기 있다.


일 때문에 비싼 선물이 필요했던 나는, 수소문 끝에 정관장에서 다양한 고가의 녹용과 홍삼을 판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 때까지 나는 정관장이라고 기껏해야 에브리데이 정도 아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홍삼이라고 하면 홍삼 젤리 정도 먹어봤으니깐.


하지만 고급 정보를 입수한 나는 회사 근처 정관장에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서, 사장님께 소곤소곤 프리미엄 녹용과 홍삼을 보러왔노라 말했다. 사장님께서는 환희에 찬 표정으로 뒷켠에 따로 마련된 프리미엄 전시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는 쭉 설명하셨다. 이거는 프리미엄 녹용 90%들어간 환인데, 한 알에 XX원이며, 이거는 천삼인데 시진핑도 먹는다는 소문이 있으며...


내가 아는 시진핑이 정관장을? 중국에도 더 좋은 보약 많을텐데? 어의가 없었지만, 회사일을 빨리 마치고 싶은 마음에 적당히 예산에 맞는 보약을 대충 사고 복귀했다. 정관정에도 수백만원이 넘는 제품이 있는 것에도 이상하게 위화감이 들었고, 에브리데이와 홍삼 젤리 밖에 몰랐던 내가 세상을 너무 갑작스레 알아버린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보약의 경제학은 이렇다. 장모님 찬스로 먹는 보약으로 인해, 한의원의 매출이 올라가고 녹용 수입업자에게 일부 대금이 지급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지역 경제에도 이바지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보약을 달이고, 보약을 퀵으로 집까지 배달하는 등) 그리고 나는 또 열심히 일하고, 국가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이며, 때때로 정관장 프리미엄 보약도 선물로 사서 영업도 할 것이다. 내나이 마흔에 먹는 보약이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실로 대단하다.


이에 반해, 아버지가 나이 마흔에 먹던 바다장어 보약은 경제에 미쳤던 파급 효과가 적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때는 바다장어가 저렴했으며, 아버지는 돈이 아까워(혹은 부족하여) 아마 어시장에서 거의 직거래에 가깝게 구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이동하였고 본인이 직접 바다장어를 고아서 드셨기 때문에 밸류체인 상 사회나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럼에도 경제 논리를 떠나, 내가 먹었던 프리미엄 녹용 보약을 내가 회사일로 선물했던 보약을 Hoya가 기억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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