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브런치에서 정확히 어제(2024년 6월 26일) 작가로 승인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공간을 어떻게 운영할까 고민했드랬다. 평소 좋아하는 그림으로 배경을 변경하고,(부처님이 사무실에 편안히 앉아 있는 그 그림) 카카오브런치 도메인 주소 또한 https://brunch.co.kr/@humorist로 변경했다. (기존에는 이름+maze조합이었다)
꽤 아이디 선택에 많은 고민을 했고, humorist로 정했다. 왜, humorist인가? 이유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이반지하님의 책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에서 '유머리스트(Humorist)'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다음은 그 중의 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서 레즈비언 작가 프랜 리보위츠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인터뷰와 대화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도시인처럼>을 보았다. 거기서 프랜 리보위츠의 과거 영상자료 중에 그를 'Author/Humorist'라고 표기한 것이 눈에 확 들어왔다. 유머리스트. 뭔가 맘에 드는 말이었다. 한국말로 좋은 대체어가 있으면 좋겠는데, 재담꾼 정도 되려나. 암튼 나는 내 직업 중에 하나가 이것인 것 같다. 물론 코미디언 같기도 한데 저 말이 쫌 맘에 들어서 SNS 프로필에 슬그머니 넣어봤다...
나도 이반지하님을 따라 슬그머니 넣어봤다. (카톡 대문도 Humorist이다). 굳이 내 생각을 조금 더한다면, 나는 유머(Humor)가 세상을 조금은 더 살기 좋게 바꾸는 힘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유머리스트가 되고 싶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Humorist는 조금 세련된 아이디인 것 같다. 최소한 나의 네이버와 한메일 아이디보다는.
내가 어렸을 때 처음 메일에 가입할 당시, 아이디 네이밍 경쟁은 치열하지 않았다. 나의 한메일과 네이버 메일 아이디는 동일했을 정도니깐. 대략 20여 년 전에 처음 가입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실제로 네이버에 들어가서 가입일을 확인해보니 2004년 11월이었다. 무려 20년 전이다. 한메일은 그보다 더 빨리 가입한 기억이 있으니, 아마도 20년은 훌쩍 넘었으리라. 20년 전의 내가 작명한 아이디는 PASA와 내 생일의 조합이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사실은 너무 잘 안다... 다만 부끄러워서 말을 못할 뿐. 나는 내 메일 아이디를 생각할 때마다 이불을 뻥뻥찬다) 고등학생이었던 내가저질렀던 실로 유치하고 조악한 만행이었다.
<네이버 메일 가입일>
불혹(不惑, 나이 마흔)을 갓 넘긴 지금은 나름 발전했다.
앞서 말한, 유머리스트Humorist, (뿌듯하다)
스벅 아이디는 '말보로 레드'다. 스벅에서 음료가 완료되면 친절한 crew님이 내 아이디를 부른다.
'말보로 레드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같이 간 내 지인은 묻는다.
'너는 담배도 안 피면서, 왜 아이디가 말보로 레드야?' 나는 최대한 쌜쭉하게 대답한다.
'박상영 작가님의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재희가 좋아하는 담배가 말보로 레드거든.'
지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게 다야?' 나는 또 최대한 쌜쭉하게 대답한다.
'재희는 냉동실에 말보로 레드를 보관하거든.'
'왜???' 지인은 궁금한게 많다. 그럼 나는 박상영 작가님으로 빙의해서 대답한다.
'재희는 새 담배를 꺼내 피울 때마다 입술이 시원해서 좋대. 그래서 나도 냉동실에 있는 말보로 레드를 좋아해.'
지인은 더이상 말이 없다.
'바그다드Cafe'도 내가 좋아하는 아이디다. 혹자는 1993년에 개봉한 독일 영화 '바그다드 까페'를 생각할지도 모른다. 애석하게도 그 뜻은 아니다. 나에게 '바그다드Cafe'는 '이라크 바그다드에 있는 실제 Cafe'다. 나는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바그다드에서 노동자로 근무했는데, (위험해서 자주 들리지는 못하고) 그 당시 들렸던 Cafe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말했다. (사실은 내가 말했다) '쓸데없는 걱정은 있어도,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고'
그 경험들이 빠샤에서 말보로 레드로, 바그다드Cafe로, humorist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싶다.
같은 이유로 별 생각없이 빠샤를 작명하던 그시절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 시절에는 무한한 가능성과 젊음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겠지만, 반대편 나를 채우는 막연함, 불안함, 힘듦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신께서 지금의 경험과 정신을 가지고 그때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기꺼이 받들겠지만서도, 그냥 그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신의 명령을 거부하겠다.
비록 나는 그 때에 비해 나이 들고, 배도 나오고, 시간도 없고, 체력도 딸리는 중년 아저씨이지만, 지금 나를 채우고 있는 내 경험, 독서, 사색들을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신의 명령도 감히 거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