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코로나 시절, 디지털 감시가 강화 되었을 때 100년 전 사람이 심심치 않게 언급되었다. 바로 1903년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인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이다. 우리에게는 필명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조지 오웰은 1903년 인도 모티하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리처드 월러스 블레어는 인도 제국의 관리였기 때문에 가족은 인도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조지 오웰이 태어난 지 1년 후인 1904년에 그의 어머니와 함께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영국에서 교육을 받고 이튼 칼리지를 졸업했다고 한다. 인도령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 몇 년간 영국 제국 경찰로 근무했고, 이후 유럽으로 돌아와 다수의 작품을 집필했다. 스페인 내전 중에는 좌익 민병대로도 활동했다고 알려져있다. 범상치 않은 생애이자 인물이다.
그가 남긴 대표작 중에 <1984>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이 바로 코로나 시국에 자주 회자되었다. '빅브라더'로 대표되는절대 권력의 통제/감시 통치가, 코로나 시국의 통제/감시 정치와 유사하다는 식이었다. 조지 오웰은 1948년에 <1984>를 쓰며 전체주의에 입각한 통제 통치를 날 선 감각으로 비판했는데, 놀랍게도 세기를 건너 뛰어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코로나 때는 호들갑스럽게 더 난리났다. 100년 뒤를 예언한 게 아니냐고... 좀 유난스러운 해석이지만 그래도 시공간을 초월한 통찰이 있는 건 사실이다)
또 다른 대표 작품 중에 <동물농장>도 있다. 기억이 맞다면 어렸을 때 만화영화로 즐겨 봤던, 탐욕스러운 돼지가 주인공인 그 작품일게다. <동물농장>이라는 작품을 최초로 조지 오웰이 썼을 때는 스탈린주의와 소련의 권력 남용을 비판한 풍자 소설이라고 알려졌다. 즉, 새로운 독재자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통해 혁명의 변질을 비판했다. 그래서 내가 아이였을 때인 30년 전에도 검열없이 만화영화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작가의 원래 취지인 스탈린주의와 소련의 권력 남용을 충실히 비판하고 나아가 공산주의의 한계를 지적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표면적인 작품 해설을 넘어, 많은 권력자들이 초심과는 다르게 변질되지 않았던가? <동물농장>은 단순히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을 넘어 이념에 대한 성찰과 권력의 본질을 밝힌 소설이지 않을까싶다. 그래서 공산주의가 대부분 몰락한 지금도 의미있게 읽히리라.
나는 <1984>와 <동물농장>도 좋아하지만, 사실 조지 오웰의 소설 중에는 <버마 시절>을 최애한다. 조지 오웰이 이튼 스쿨을 마치고 대영제국의 경찰로 1922년부터 1927년까지 근무한 곳이 당시 인도령인 버마였다. 그 때 보고 듣고, 직접 경험을 토대로 <버마 시절>을 쓴 것이다.
나도 약 100년을 사이에 두고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 시멘트 노동자로 근무했었다. 당시에는 참 힘든 점이 많았다. 시멘트 공장은 석회석 광산에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무 환경도 녹록치 않았을 뿐더러,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멘트 공장에서 시멘트가 잘 생산되지 않아 한국 본사의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컸다. 생각해보라, 미얀마에 수백억원을 투자한 한국 대기업의 60년대생 임원들이 가만히 있었겠나?
하지만 분명 좋았던 점도 많았다. 그 중 첫 번째로 미얀마 비어을 꼽는다. 동남아의 습습한 날씨에서 마시는 시원한 현지 맥주는 '캬~'를 절로 부를 수 밖에 없다. 희한하게도 한국에서 미얀마 비어를 마시면 그 맛이 나지 않아 실망하곤 한다. 결국 내가 좋아했던 것은 맥주 그 자체가 아니라, 맥주를 시원하게 마셨던 그 분위기와 힘든 시절을 달래주던 그 무엇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숙소 주변을 수놓았던 수 많은 반딧불이를, 미얀마 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얀마 근무의 거의 막바지에 읽었던 <버마 시절>이 던진 충격을 사랑한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가족과 2년 넘게 떨어져 고생한 이유는 이 책 한권을 읽기 위함이 아니였나 싶을 정도였다.
누군가 '<버마 시절>의 무엇이 그토록 충격에 빠뜨렸어요?'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1923년의 버마와 2018년의 미얀마가 너무 똑같아요. 조지 오웰이 100년 전에 버마에서 느낀 점을 제가 2018년에 고스란히 느꼈어요. 시간을 초월해 제가 그토록 좋아하는 100년 전 작가가 느낀 점을 같은 공간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경험 자체가 엄청난 경험이었어요. 단순히 몇 일 만의 여행으로는 알 수 없고, 몇 년은 현지에서 현지인들과 밀접하게 교감을 해야지만 경험할 수 있죠.'
<버마 시절>의 첫 장면은 치안 판사 우 포 킨의 묘사로 시작되는데, 내가 알던 어떤 미얀마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오버랩 되었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 내내, 어쩜 이렇게 100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같은 모습이 반복되는지도 거듭 놀라웠다. (어떤 점이 그렇게 똑 같았는지는, 다른 지면을 통해 또 한바탕 신명나게 얘기해보고자 한다)
다만, 딱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미얀마 시멘트 노동자로 부임하기 전에 <버마 시절>을 읽었다면, 미얀마 시멘트 노동자 시절이 덜 힘들고 더 의미있지 않았을까싶다. 비슷한 후회를 아프가니스탄 이민자 출신의 할리드 호세이니 3편의 소설인 <연을 쫓는 아이>, <천 개의 찬란한 태양>, <그리고 산이 울렸다>를 아프가니스탄 파병 가기 전에 읽었다면 파병 생활이 더 의미있었지 않았을까이다. 물론, 늦게나마 파병 이후에 3편의 소설을 연달아 읽었고, 나의 아프가니스탄 파병이 더 큰 의미로 각인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한 후배가 소설책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나는 주저없이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추천했다. (물론, 그 후배가 아프가니스탄으로 출장 가지는 않는다) 한 번 읽어보라고. 지구 반대편의 여성의 인생을 같이 느껴보자고.
그 때 느꼈다. 나는 그런 선배가 아빠가 되고 싶다고. 예를 들어, 훗날 Hoya가 아빠처럼 아프가니스탄으로 장기 출장을 가야할 때(그 때는 파병이 아닌, 일로써 Hoya가 출장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그저 할리드 호세이니의 소설을 한 권 주는 것이다. 출장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읽어보라고. 라떼 파병 얘기는 하지 않는게 포인트다.
그렇다. 나는 소중한 누군가의 삶에 고비마다, 변곡점마다 그에 맞는 소설을 추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미얀마로 아프가니스탄으로 간다고 했을 때, <버마 시절>을 <연을 쫓는 아이>를 내밀어 준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부지런히 읽고 쓰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오늘도 조용히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