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목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오후까지 뜻하지 않게 육아 휴가를 맞았다. 아내는 Hoya(글쓴이 31개월된 아들)와 함께 속초로 여행을 떠났다. 원래 계획은 나도 목요일 회사를 마치고 속초로 조인할 예정이었다. 금요일에는 연차를 쓰고.
하지만 회사일 때문에 일정이 꼬였고 결국 나는 속초에 가지 못했다. 대신 처제가 함께 갔다. 아내는 일부러 화사일 핑계를 대는 게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끊임없이 보냈다. 심지어 여행을 마친 지금도 그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나는 진짜 억울하다. 먹고사니즘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족 여행도 포기한 안타까운 노동자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가족 휴가는 함께 하지 못했으나 목요일 저녁, 금요일 저녁, 토요일 오후까지 홀로 육아 휴가는 갈 수 있었다. 목요일과 금요일은 출근해야 했기 때문에, 육아 휴가라고 해서 딱히 대단한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단지 목요일 저녁과 금요일 저녁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을 뿐. (토요일은 오랜만에 늦잠을 잤지만, 이후에는 화장실이며 집안 청소를 해서 그닥 감흥은 없었다)
목요일 저녁에는 그동안 벼렀던 집근처 야간 수영장을 가서 오랜만에 자유 수영을 했드랬다. 몇 년 만에 찾은 수영장은 여전했다. 초급 중급 상급으로 나뉘어져 각자의 실력대로 레인에서 수영을 했다. 몇 해전 나는 나름 수영에 진심이었던 적이 있었다. 특히나 오리발 수영에 자신있었고, 2017년 영등포구민배 수영대회에서 단체 오리발 수영 2등 출신이라는 자부심도 지금까지 마음 한켠에 남아있다. 그 때는 몸도 마음도 날렵했고, 물 속에서는 더 날렵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을 잊지 못한 것일까? 나는 바로 상급 레인에서 힘차게 자유형을 시작했다. 하지만... 25미터도 채 가지 못하고 뒷사람에게 잡혀 민망한 상황을 연출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배만 뽈록 나온 체력이 딸리는 중년의 아저씨일 뿐이다. 조용히 초급 레인으로 몸을 옮겨 조용히 초급의 리듬에 맞춰 수영을 했다. 어라? 내 체력에 맞춰 천천히 수영을 하니 또 나름 재미가 있었다. 체력이 한창일 때는 오리발 수영을 하며 스피드를 즐겼는데, 천천히 수영 비기너들과 함께 하는 수영도 괜찮았다. 다양한 또래의 사람들이 수영을 익히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이 좋았다. 당분간 초급 레인에서 수영을 즐기며 조급해 하지말고 천천히 체력을 되찾아야겠다고 목요일 늦은 밤에 생각했다.
금요일 밤에는 무엇을 할지 고민 되었다. 불금인데, 육아 휴가라니... 이런 조합이. '팀원들을 강제로 소환해서 술을 마실까? 아니면 지인을 만날까?' 갖가지 즐거운 상상을 하며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바로 '집에서 치콜(치킨+콜라)을 먹고 마시며, 영화를 보는 것' 이었다.
에이... 오랜만에 불금+육휴인데, 치콜+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사연이 있다. 일단, 요즈음 나는 비염과 감기로 인해 2주째 고생하고 있다 보니, 술은 마시기 싫었다. 하지만 술이 없다면 저녁에 사람들을 만나기가 힘든 나이다보니, 사람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거의 3년 가까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사연은 이렇다. Hoya가 태어날 때쯤 아내와 나는 집에 TV를 없애기로 합의했다. 아무래도 집에 TV가 있으면 태어날 아기에게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TV는 없더라도 핸드폰과 테블릿이 있으니 불편함은 없을 줄 알았다.
실제로 아내와 나는 Hoya가 태어나기 전에 TV를 없앴고, TV없는 집에서 잘 적응해나갔다. 특히, 나는 너무 잘 적응해서 점점 영상을 보지 않게 되었다. 그 전에는 유튜브며, 넷플릭스를 자주 봤었는데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영상과 멀어진데는 외부적 요인(육아, TV 없는 집 등등)과 내부적 요인(읽고 쓰는 삶의 추구, 시간 관리 차원 증등)이 얽혀고, 이제는 정말 1년동안 총 영상 시청 시간이 10시간도 되지 않는다.
이런 내가 불금+육휴를 맞아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어쩌면 자연스런 전개이다. 실제로 나는 영화를 엄청 좋아했으니깐. 예전에 이라크에 주재할 때는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일주일에 3~4편 영화를 봤드랬다. 3년 동안.
유튜브의 기록을 살펴보니 실제 내가 얼마나 영상을 보지 않는지 알 수 있다. 특이한 건 이런 나도, 작년 8월부터 범죄도시4를 기다렸다는 점이다.
집에서 영화보기를결정하자, 또 다른 고민에 휩싸였다. 바로 '어떤 영화를 고를까?' 넷플릭스도 오래 전에 해지한 까닭에 네이버 시리즈온에서 유료로 영화를 다운받기로 마음 먹었다. 1년에 한 번 정도 보는 영화이기 때문에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리즈온 영화 목록에서 눈에 띈 건 단연 동석이 형님의 '범죄도시4' 였다. (새로나온 매드맥스가 목록에 있었으면 두 영화 사이에서 엄청 고민했겠지만... 매드맥스는 아직 목록에 없었다) 느와르와 범죄 액션을 좋아하는 1인으로 범죄도시 시리즈를 다 챙겨본 나는 이번에도 천만 영화 '범죄도시4'를 선택했다.
오랜만에 보는 영화를 보니 기대감을 넘어 살짝 떨리기도 했다. Hoya의 작은 책상에 아이패드를 올려놓고, 좋아하는 프라닭 마블로 윙봉을 옆에 두어 세팅을 마쳤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는 불금+육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다 보기 전까지는.
프라닭 마블로 윙봉을 다 먹고, 영화가 끝났을 때 든 생각은 그저그랬다. 그렇게 재밌지도 않았고, 오랜만에 본 영화인데도 남는 게 없었다. 물론, 그전에도 오락 영화를 통해 무엇을 남긴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고, 이번에도 '범죄도시4'를 고른 순간에도 엄청난 것을 남기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였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허탈하지?'라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고별의별 생각이 솟아 올랐다.
우선 든 생각은, 꽤 오랫동안 식사를 하지 않은 사람이 첫 끼로 자극적인 라면을 먹은 느낌. 그렇다면 '범죄도시4'는 라면인 것일까?
지난 범죄도시 시리즈도 이번 '범죄도시4'와 비슷한 수준의 영화일텐데 과거의 나는 과거의 범죄도시를 보고도 허탈감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런 상태이다. 그렇다면 '범죄도시5'가 나온다면 나는 보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 나는 '범죄도시5'를 보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범죄도시 시리즈는 4로 종결했다.
이번 기회에 나는 이제 영상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 지금의 상태(영상을 제대로 볼 수도 없고 즐기지도 못하는)에 대한 불편과 불만은 없는가? 조금 더 살아봐야 겠지만, 나의 대답은 '불편과 불만은 거의 없고, 꽤 괜찮은 점도 많다'이다. 예를 들어, 시간이 부족한 와중에도 글 쓰는 시간이 꽤 생겼고, 아직 부족하지만 글을 써내고 있다. 이게 자발적인 영상 단절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영상에서 오는 소재 발굴의 장점과 재미 그리고 유행에는 뒤떨어지는 단점도 있지만, 나에게는 아직 단점보다 장점이 더 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