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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그다드Cafe Sep 11. 2024

대기업 20년차 사무직의 이직 고민

중소기업 만만치 않거든?

2004년에 직장 생활을 시작해서 대기업에서만 20년 째인 아는 지인이자 형이 있다. 사회에서 만났지만 제법 죽이 잘 맞아, 사석에서는 형이라고 부른다. (BK라고 지칭)


BK형은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에서 구매 사무직으로만 20년을 근무했고, 지금은 팀장을 맡고 있다. 그런 BK형과 오랜만에 만났다.


BK: 네가 SK에서 중소기업으로 이직한지 얼마나 됐지? (그렇다... 나는 SK에서 내 발로 걸어 나와 중소기업으로 이직했다)


https://brunch.co.kr/@humorist/62

'나': 2년 넘었지.


BK: 다닐만하냐?


'나': 죽겄어. 스트레스 때문에 비염 심해져서, 지금 항생제만 한 움큼씩 먹고 있잖아. 설사 때문에 항생제 되도록 안 먹으려고 하는데...

내가 다니는 이비인후과 안내문구. 그런데 '간혹' 아니던데요???

BK: 술 많이 마셔서 그런 건 아니고?


'나': (어떻게 알았지?)...


 BK: 항생제 먹으면서 술 먹지 마라. 뒤진다... 그나저나 중소기업도 스트레스 심하냐?


'나': 형... 중소기업에서는 다 해야 돼. 형은 구매만 하잖아. 난 여기서 구매도 하고, 전략도 짜고, 영업도 하고, 계약서 검토도 하고, 리서치도 하고, 소송 법무 대응도 하고, 통역도 하고.


BK: 통역? 너 영어 못 하잖아.


'나': 그건 그렇지. 그런데 내 위에 상사가 경상도 말을 잘 못해서 부산이나 경상도 지방 출장 갈 땐 내가 따라가서 통역도 하고 분위기도 띄우고 그러지.


BK: X랄... 그런데 그렇게 많은 일을 하는 게 가능하냐?


'나': 어쩌겄어. 먹고살아야지. Hoya(글쓴이 33개월 된 아들)만 아니면 때려치우고 대충 살겠는데, 내가 세상으로 불러낸 생명은 잘 키워야잖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당장은 월급쟁이가 답이야. 그래서 열심히 하고 있어.


BK: 그렇구나... 나도 요새 너무 힘드네. 위에서는 말도 안 되게 쪼기만 하고, 밑에는 말도 안 듣고.... 넌 급여는 만족하냐? SK 다니다가, 중소로 갔잖아.


'나': 당연히 복지나 급여나 떨어지지. 근데 난 다시 대기업으로 못 갈 거 같아.


BK: 대기업에서도 너 안 뽑아줄걸?


'나': (어떻게 알았지?)...


BK: 그만큼 중소기업이 좋은 거냐? 머가 그렇게 좋냐??


'나': 장단점이 다 있지. 중소기업 다니면서 힘든 거도 많아. 그런데 나는 중소기업으로 옮겨보니깐, 나에 대해서 제대로 알았어. 나는 나한테 권한 많이 주는 회사가 좋아. 그리고 대기업처럼 보고 장표 신경 안 써도 되고. 30대 후반에 중소기업으로 오니깐 다 필요 없고 진짜 실력이더라. 실력 없으면 못 살아남아. 대기업에서는 못 보던 걸 지금 제대로 보고 있지.  


BK형: 우리같은 사무직한테는 실력이 머냐?


'나': 문제 푸는거. 갈등 조율하고 결국에는 문제를 푸는 거. 얼마나 어려운 문제를 잘 푸느냐가 중소기업에서는 실력이야. 다 필요없어. 나는 위에다가 아부도 잘 안해.


BK형: 너가?? 너 대기업 다닐 때 아부 때문에 손바닥 지문 없어졌다고 그랬잖아.


'나': (손바닥을 보여주며) 중소기업으로 와서 지문 다시 생겼어. 그건 그렇고. 형, 좀 이상한데. 무슨 고민 있어? 이직하려고?


BK: 나 요새 고민이 많다. 이직도 알아봐야 되나 싶고.


'나':...


그렇다. BK형은 대기업 생활 20년 만에 심각한 현타가 온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BK형에게 조언했을까.


'나'의 조언: BK형의 경력이나 성향을 봤을 때, 당장은 이직하지 말고 몇 년간 준비를 하고 그때 가서도 마음이 그대로면 이직을 준비하는 게 좋겠다.


이렇게 조언한 이유는,


1. 대기업 20년 구매 경력으로만 밖에서 인정받기 쉽지 않다. 

- 여기서 말하는 인정이란, 지금 BK형이 대기업에서 받는 월급을 중소기업으로 왔을 때 받을 수 있느냐다. 내가 알기론 BK형은 1억이 넘는 연봉을 받는 것으로 아는데, 대기업 밖에서 연봉 1억의 의미는 엄청나다. 대기업에서 사무직으로 익힌 구매 경력으로만 중소기업에서 1억을 받는 것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봐야 한다는 뜻이다. 구매 업무로만 따진다면 본인만의 구매 노하우와 업체 관리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 같은 정보화 시대에는 구매 관련 특화된 능력을 갖기란 매우 힘들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해외 구매처에서 구매할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능력이었는데, 이제는 영어못해도 ChatGPT만 있으면 다 할 수 있다.


2. 대기업에서 요구하는 능력과 중소기업에서 요구하는 능력은 다르다. 

- 나도 L그룹과 SK에서 10여 년 일해봤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요구하는 능력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런 말 들어봤을 것이다. 대기업의 일은 시스템이 7할~8할이라고.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대기업의 일은 개개인의 능력보다는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대기업에서 오래 근무할수록 시스템에 기대서 일을 할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그 시스템이 약한 중소기업은? 중소기업은 시스템보다는 개개인의 능력이 중요하고, 또 개인에게 멀티플레이어로서의 역할을 기대한다. 특히, 사무직은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도 부지런히 다양한 업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르는 부분은 공부하고 배워서라도 해내려고 한다.


3. 대기업 '갑'의 시선으로 밖(중소기업)을 봤을 때는 쉬워 보인다.

- 시선의 차이다. 대기업에 오래 근무할수록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만만해 보이고, 내가 잘나 보인다. 전형적인 '갑'의 시선으로만 봐서 그렇다. 하지만 내가 느낀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절대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10여 년 대기업 생활을 정리하고 나와서 같이 부대끼고 보니, 중소기업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봤을 때 개개인이 더 뛰어난 것 같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하고 있다.

자본과 시스템의 힘으로 굴러가는 대기업에 비해, 후발주자인 중소기업에서는 사람이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그래서 중소기업 사람들은 만만치 않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 회사가 대기업이지 내가 대기업이 아니다. 이걸 깨달아야 한다.



나는 BK형에게 당장 성급하게 이직을 결정하지 말고, 몇 년 더 준비하라고 조언했다. BK형이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를 해야 되냐고 물어보길래, 당장 ChatGPT 유료버전부터 구독하라고 했다. 그리고 시대가 변했음을 느끼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ChatGPT를 어떻게 쓰고 있는지 직접 보여줬다. 브런치의 글에 첨부되는 그림이 어떻게 창조되는지부터 시작해서, 해외 기업의 영문 Annual Report를 3초 안에 요약 정리하는 것도 보여줬다.


끝으로 책도 많이 읽고, 고민도 많이 하라고 했다. 결국 답은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내가 몇 년 전부터 하고 있는 것들과 고민들을 그대로 공유해 준 것이다.



p.s. 드라마 <미생>이 유행했던 2014년, 나는 실제로 국내의 종합상사에 다니고 있었다. '상사맨' 뽕에 취했던 나는, 정작 그때는 드라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여전히 회사에 머물고 있긴 하지만, 이제는 <미생>을 오롯이 이해할 있게 되었다. 치기어렸던 주니어 상사맨은,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을 전쟁터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오과장의 나이가 되었고 오과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밖이 지옥이란 것도 어렴풋이 안다.


미생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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