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전 직장은 대기업 계열의 종합상사였다. 10년 가까이 근무했고, 사회생활과 일의 기본을 배웠다.
물론 울면서 배울 때도 있었고, 신혼 때 반(?) 강제로 아내와 헤어져서 동남아시아의 어느 시골 시멘트 공장 노동자로 2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좋은 기억과 섭섭한 기억이 혼재된 미생들의 세계에서 어쨌든 나는 좌절했고, 또 성장했다.
예전만 못하지만 상사맨에 로망을 가진 친구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안다. 실제 내가 상사에 있을 때 기억에 남는 B라는 후배가 있었다. B후배는 70년대와 80년대 해외 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시절에 전세계를 누비며 (무슨 계약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계약을 성사시킨 후, 007 가방에 딸러를 가득 담아오던 상사맨을 상상하며 동경했다고 했다.
B후배에게 내가 물었다.
'실제로 입사해보니깐 어때?'
B후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별 거 없네요. 그냥 월급쟁이예요.'
나는 어의가 없는 표정으로 중얼 거렸다.
'007 가방 들고 다니던 선배 상사맨도 월급쟁이였거든...'
또 기억에 남는 C후배가 있다.
C후배는 나를 상사 선배로 동경했다. (정말이다) 동경의 과정과 오해는 정말 드라마틱하나, 지금 발설하지는 않겠다.
그 때도 나는 꽤 책을 많이 읽었고, 후배들에게도 감명깊게 읽은 책을 권유하거나 곧잘 선물로 주곤 했다. C후배에게는 당시 잘 나갔던 이커머스 CEO의 인터뷰집을 추천했다.
그리고 조언이랍시고, C후배에게
'너는 혁신적인 이커머스가 잘 어울려! 그 이유는 말야...'하고 한참을 떠들었다.
실제로 C후배는 그 책을 읽었고, 이커머스 회사로 이직을 준비했다고 나중에 들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C후배는 이직을 하지 않았고, 지금도 같은 회사에 잘 다니고 있다. (내가 추천한 그 책의 이커머스 회사가 요즈음 경영이 매우 어렵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생각해보니 그 때 나는 꼰대가 아닌 멋진 선배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책도 많이 읽고, 트렌드에 민감하며, 후배에게는 잔소리가 아닌 꼭 필요한 조언만을 해주는 선배라고 스스로를 판단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렇고 당시에도 좋은 선배가 아니었다. 그런 척을 하는 선배일 뿐 이었다.
생각해보라. 내가 머라고, '그 이커머스 회사가 전망있어 보이고 넌 잘 어울려'라고 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너무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장강명 작가님은 <미세 좌절의 시대>에서 작가님만의 몇 가지 원칙을 공개했다. '개인은 존엄하다. 세상은 복잡하다. 사실은 믿음보다 중요하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다시 C후배가 생각났다. 그리고 복잡한 세상에서 존엄한 개인에게 함부로 조언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내가 나를 스스로 믿는 멋진 선배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며.
다음에 C후배를 만나면 정식으로 사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