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서울로 이직한 후배를 보며(上)
힘냅시다! 지방러
나는 지금 경상도에 본사를 둔 한 제조업체에 다니고 있다. 약 2년 반 전에 서울 강서구에 영업 사무소가 설립됐고, 나는 2년 전에 지금의 회사로 이직했다. (벌써 2년이나 되었다니, 새삼 놀랍고 대견하다. 나자신 칭찬해!) 강서구의 영업 사무소로 출근하며, 경상도 본사로 출장을 자주 다니는 중이다.
이직 초반, 나는 적응에는 자신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범부산 지역('공정하다는 착각에 대한 나의 g소리' 참고)에 나고 자라 '경아(경상도의 아들)'라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부심 때문이었다. 냉정히 말하면 '우리가 남이가'라는 지연에 막연히 기대했다. 마지막으로 나의 필사기이자 스펙인 유창한 바이랭구얼(Seoul Mal/Gyeongsangnam-do Mal) 능력을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엄한 경기도 오산이었다. 물리적으로 떨어진 사무실 위치(경상도-서울 강서구)와 굴러온 돌에 대한 선입견으로 이직 초반 꽤 힘들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버텨냈고, 지금은 물리적인 거리의 한계를 뛰어넘어 본사의 많은 사람들과 잘 지낸다. 누군가 그랬다. 회사 생활의 7할은 인간 관계라고, 오죽하면 영업의 꽃은 내부 영업이라는 말이 있을까. 따라서 자타공인(?) 내부 영업에 성공한 나는 결국 새로운 직장에 적응할 수 있었다.
이 또한, 나의 몇 가지 적응 전략이 있는데 나중에 자세히 소개하겠다. (벌써 제목도 지었다. '경남에 본사를 둔 제조회사에서 외딴 서울 사무소 경력직 팀장으로 살아남는 법')
혹시 글을 기다리는 분이 있지 않을까 지레짐작하여 한 가지만 먼저 공개하겠다.
바로… '경남 본사에서 서울 영업 사무소로 출장 오는 사람이 있으면, 직급/성별/나이/종교 등의 차이를 불문하고, 무조건 저녁 식사를 함께해라!' 이다.
이게 머야... 겨우... 라고 지금 독자분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방에서 서울로 출장 온 친구들은 서울이 생경해서 두배로 힘들 것이다. 이런 친구들이 일을 마치고 터덜터덜 멀리멀리 집으로 그냥 돌아가는 것보단, 누군가가 따뜻하게 저녁을 챙겨주면 은근히 기억에 남는다. 소주 한 잔 같이 하면 더 좋고. 적당히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ktx나 비행기에 몸을 실으면 잠도 잘 오는 건 덤이다. (물론, 과음은 금물!)
'밥 잘 사주는 강서구의 어떤 이상한 형 혹은 동생 혹은 낀대'라고 기억되면 나쁠 게 없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가 쌓이다 보면 어느덧 적응과 안착이라는 목표에 가까워진다. 이직의 성공은 절대 멀리 있지 않다라는 게 복수의 이직을 하고 적응에 성공한 내 생각이다.
성공적으로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다보니, 꽤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터놓는 후배들도 생겼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 중 N이라는 후배의 얘기를 하고자 한다.
N후배는 30년 넘게 경남의 어느 지방에서 쭉 자랐더랬다. 초등학교-중학교-대학교-직장까지 반경 15킬로미터를 넘기지 않고 30년 넘게 성실히 살아왔더랬다. 그리고 직장 생활 중에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하고 나름 안정적으로 삶을 가꾸어 나가는 중이었다.
그런 성실한 모습이 좋아서 나도 본사로 출장을 가면 N후배를 종종 불러내어 소주잔을 같이 기울이곤 했다. 그렇게 서로 정이 들었다.
이런 N후배가 나에게 고민을 토로했다. 바로 바로 조금 더 큰 조직과 새로운 환경에 대한 동경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서울에서 대기업 경험이 있으니 조언도 구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아... 조언 조심해야 하는데... 조언과 조심편 참고) 바꿔말하면 30년 넘게 좁은 울타리에서 오는 답답함이었다. 안정의 반댓말는 불안이 아니라 답답함이라지 않던가.
N후배의 고민을 들은 나는, 8분 9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N후배에게 내얘기를 들려주었다. 시간을 20년 전으로 돌려 나의 대학 진학때 얘기다. 나도 그 때 N후배와 같이 먼가 모를 갑갑함을 느꼈다. 고3때까지 이사를 많이 다니긴 했지만 경상도 안에서만 이뤄졌고, 내 주위의 환경은 더 나빠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경상도를, 아버지를, 떠나고 싶어했다. 마침 하늘이 도와 수능도 꽤 잘 본 상태였고 서울의 어느 대학에 최종 합격했다. 물론 부산의 어느 한 대학에도 무려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동시에 최종 합격했지만,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서울 상경을 혼자 결정했다.
서울 상경을 혼자 결정하고, 아버지께 통보했다. (맞다. '공정하다는 착각에 대한 나의 g소리'에 등장하는 그 엄격한 아버지다) 아버지는 아무 것도 없는 촌놈이 서울에서 대학 다니면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완강히 반대했다. 아니! 고 3이 돈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게 당연함에도, 아버지는 본인의 능력없음을 아들 핑계를 댔다고 그 때의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더 바득바득 서울 상경을 추진했다. (물론, 지금은 아버지를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해하는 단계에 왔기 때문에 이런 글도 쓸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치기 어린 마음에 첫 등록금만 보태주시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노라고 큰소리를 쳤다. 정말 크게 아버지에게 소리쳤다. 19살 인생에서 아마 가장 크게 무뚝뚝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내 주장을 펼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한양으로 상경했지만, 진짜 어려움은 상경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모든 것이 부족했던 촌놈의 서울살이는 쉽지 않았다. 분명히 목적지 가는 지하철을 탔는데, 중간에서 사람들이 다 내리고, 객실의 전등이 소등되어 당황했던 경험. 돈이 모자라 한학기를 다니기 위해, 한학기를 휴학하고 다양한 알바를 했던 시간들.
그 때의 후유증인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나는 서울에서 버스타는 것을 싫어한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 어디든 다닐 수 있지만(아, 이것도 매우 놀랍다. 얼마 전 스마트폰으로 혼자서 운전하며 첫 미국 출장을 마쳤는데, 이 얘기도 서서히 풀어봐야겠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서울을 잘 모르고 돈도 없던 이방인이 갈 수 있는 데가 많이 없었다. 물론,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관광 지도를 이용해서 적극적으로 다닐 수도 있었겠지만 그 때 나는 모든 게 위축된 상태로, 새로움이 주는 즐거움 보다는 낯선 것에 대한 스트레스에 사로잡혀 있던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버스를 잘 못 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목적지가 비교적 명확하게 설정된 지하철을 선호했다. 아니, 길을 잃을 가능성이 적었던 지하철을 선호했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그 때 부터였을까, 지금도 나는 지하철이 편하다.
나의 서울 상경기자 적응기이자 고생기(지금도 나는 서울이 낯설다. 하지만 이제는 고향도 낯선 것은 함정)를 N후배에게 조금씩 조금씩 들려줄수록 후배는 반대로 서울 상경에 대한 꿈을 키워갔다. (그 때 더 뜯어 말렸어야 했는데... 더 극적으로 지방러의 서울 고생기를 들려줬어야 했는데...)
결국, N후배는 서울 강남에 위치한 대기업과 중견기업 사이의 어느 회사에 덜컥 합격해버렸다. (대견하고, 축하해!) 그리고 나서는 나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구했다. 아마도 내가 이직 경험도 꽤 있고, N후배가 합격한 회사에 대해서도 조금 알고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이 번 편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다음 편에 N후배 근황으로 '지방에서 서울로 이직한 후배를 보며'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