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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그다드Cafe Oct 13. 2024

프랑스 직장인의 오만과 편견

청룡의 시대

올해는 2024년. KTX가 개통된 지 20년 되는 해이다. 나와 아주 가까운 지인인 HJ가 철도와 관련된 업종에 종사해서 잘 안다.


HJ가 어느 날 KTX 20주년 기념 머그컵을 가져다주었다. 디자인은 참 투박하고 느낌이라곤 1도 없는 머그컵이었지만 나는 티를 낼 순 없었다. 그리고 호들갑을 떨며, 컵이 너무 심플하고 실용적이라는 둥, KTX의 날렵함과 편리성의 정신을 잘 녹인 디자인이라는 둥 온갖 쓸데없고 영혼 없는 아부와 아첨을 꺼내다 드렸다. 머그컵 하나에. 왜냐하면 HJ는 나의 아내님이기 때문이다.


HJ이자, 아내님이자, 철도업에 종사하는 그분이 나에게 투박한 머그컵을 내밀며 온갖 생색을 냈다.


아내님이자 철도업 종사자 HJ: 컵 디자인 어때?


나: 괜찮네. 깔끔하고.


HJ: 애껴써(아껴써). 그거 이제 구하려고 해도 못 구해. 한정판 이거든.

KTX 개통 20주년 기념 한정판 머그컵


나: (별로 안 구하고 싶거든? 그리고 나는 좋아하는 머그컵이랑 텀블러 이미 회사에 많거든?)* 오오오. 알았어. 고마워. 여보님.


*마음의 소리


HJ: 올해가 KTX 개통된 지 20년 됐어. KTX가 프랑스 떼제베TSV*에서 기술 이전받은 거는 알고 있지? 선배들 얘기 들어보니깐, 그때 우리 정부에서 고속열차 도입하려고 프랑스 기관한테 돈 엄청 줬대.

근데 더 부들부들한 거는 먼지 알아? 걔네들이 돈 엄청 받아먹고도 그렇게 갑질을 했나 봐.


나: 어어어. 그래그래.


HJ: 왜 이렇게 듣는데 성의가 없어?


나: 어어어. 아닌데? 재미있는데? 갑자기 얼마 전에 건방진 프랑스 직장인이 생각 나서 그랬어.


HJ: 핑계 대지 마.


진짜다. 핑계가 아니라 아내가 떼제베 얘기를 하길래 건방진 프랑스 직장인이 생각났드랬다.


몇 달 전, 우리 회사의 고객사인 스웨덴 업체의 구매팀 직원이자 프랑스인 V가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에서 일정을 소화한 후, 나와 같이 지방으로 출장을 동행키로 했다. 그렇게 서울역에서 KTX를 같이 탔는데 공교롭게도 계단에 열차 제조업체인 프랑스 알스톰Alstom의 명판이 붙어 있었다.


*프랑스어 Train à Grande Vitesse의 약자. ‘고속열차’를 의미


프랑스인 V가 발견한 프랑스 회사 알스톰 명판


V는 아는 체와 젠체를 하며 말했다.


V: 오, 이 기차 우리가 준거네?


순간, 어떤 계시가 왔다. 어떤 계시냐면 저 프랑스인에게는 참 교육이 필요하다는 계시. 나는 비록 애국자도 아니고, 애국심도 평균 이하이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수 없음을 느꼈다. F직장인에 대한 K직장인의 교육 이랄까? V의 왜곡된 기억과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서 팔을 걷어 붙였다. 심지어 나는 철도인의 남편 아니던가.


사실 아내님은 술에 취하면 종종 평소에도 나에게 철도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철도의 중요성에 대해 강의를 해왔다. 안 그러면 내가 협궤 표준궤 광궤의 차이점을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최선을 다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Because my wife is working at Korean Railway Company, I am familiar with a train history. You have wrong information~~~

(내 아내님이 철도회사 다녀서 아는데, 너 먼가 잘 못 알고 있어~~~)


쏼라쏼라...


20년도 훨씬 전에 우리 정부에서 프랑스 정부로부터   떼제베 시스템을 도입한 거도 맞고, 알스톰이 만든 고속열차도 사 온 게 맞다. 하지만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정당하게 도입했다.


2008년에는 현대로템이라는 한국 회사에서 우리나라 자체 고속열차 KTX산천을 개발했고, 2021년에는 KTX이음을 개발했다. 그리고 KTX청룡이라고 완전 개량된 고속열차가 곧 나올 거다.


쏼라쏼라~~


이야기를 계속 듣던 V는,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샐쭉해져서는 그 이후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인 샐쭉해진 거 처음 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간혹 나이 드신 분들 중에 아직도 코쟁이(백인)와 그들의 나라(주로 미국, 캐나다, 서유럽을 지칭)에 대해 무조건적인 신뢰와 '한수 접고 들어가'는 분들이 계시다.

물론, 그분들이 한창 경제 활동을 할 때인 80년대 90년대 2000년 초반까지 우리는 열심히 쫓아가는 시절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굳이 GDP며, 국가별 무역순위 등을 내세우지 않아도, 이제는 우리나라도 대등하고, 평균적인 국민 개개인도 우수하다고 생각한다. KTX청룡이 떼제베의 성능보다 낫듯이 말이다.


제인 오스틴의 오래전 소설 중에 <오만과 편견>이 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처음에는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만 다양한 사건들과 경험을 통해 점점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고 발전한다는 내용이다. 특히, 주인공인 다아시는 엘리자베스를 통해 점차 변화하고 성장한다. 성별과 상황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V에게 나는 엘리자베스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만과 편견을 깨고, 정신 차리라는 말이다.



p.s 아, 그리고 V도 2차 전지 분야 구매 업무를 담당하는데, 실력 면에서는 나도 V에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산업을 바라보는 전반적인 시각이라든지, SCM에 대한 이해라든지. 아! 이건 또 다른 오만과 편견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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