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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그다드Cafe Oct 23. 2024

북한군 파병에 대한 어느 평범한 직장인의 생각

전쟁일기: 우크라이나의 눈물

해외파병海外派兵:  자기 나라의 군대나 군함, 군용기 따위를 군사적 목적으로 다른 나라의 영토나 영해, 영공에 파견하는 일.


남의 나라 군대의 해외파병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시끄럽다. 남의 나라라고는 하지만 76년 전까지 우리와 같은 나라였던 북한에서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자국군을 파병 보냈기 때문에 더 시끄럽다. 나는 파병의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어떤 국제적 역학 관계가 얽힌 것인지, 권력의 추가 어디를 향해서 그런 것인지, 파병의 대가가 무엇인지, 러시아가 얼마나 목숨값을 지불할 것인지, 서방에서는 왜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해외파병과 전쟁에 대해서는 조금 안다. 왜냐하면 내가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2번이나.


첫 번째 파병에 대한 경험은 2006년 아프가니스탄으로의 파병이었다. 당시 나는, 20대 초반이었고 한국군 소속으로 의무 복무 중에 아프가니스탄 전쟁터로 자원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한국군은 미군에 소속되어, 탈레반과의 전쟁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지원하는 역할이라 덜 위험했지만 그래도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의 대의명분은 아프간 국민들에게 ‘항구적 자유’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는데 나도 일부 기여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대의명분이 유효한지, 아니면 그 명분이라는 것이 원래 존재했는지 쉬이 답할 수 없다. 지난 2020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 철군했고, 탈레반이 다시 정권을 잡았으며, 아프간 국민들은 여전히 전쟁과도 같은 날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군이 급히 철군하며 남긴 다수의 장갑차와 무기들이 고스란히 탈레반에게 전달되어 이제는 아프간 국민들을 통치하고 위협하는 무기로 쓰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역사는 수십 년이 되었고, 현재도 전쟁의 영향으로 일반 국민들은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나는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의 역사와 그 원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적을 수도 없지만 파병 기간 중에 만났던 한 아프간 소년은 안다.


내가 미군과 함께 어떤 작전을 위해 아프간의 일반 민가를 찾았을 때, 한 어린아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아이들이 자살 폭탄 테러에 무자비하게 이용되었기 때문에, 접촉을 피하라는 교육을 미리 받았음에도, 그때의 나는 그 아이의 다가옴을 막을 수 없었다.


아이는 내 손을 자신의 다리로 가져갔다. 그리고 만져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나의 손은 그 아이의 다리를 살짝 스쳤는데, 아이의 연약하고 따뜻한 피부가 아닌, 이질적인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소름이 돋았다. 놀란 내 모습이 아이는 웃기는지, 다리를 감싸고 있던 바지를 올려 보였다. 거기에는 플라스틱 의족이 있었다. 지뢰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아이는 지금의 나의 아들보다 조금 큰 정도였던 것 같다. 


두 번째 기억은 전쟁에 대한 것이다. 전쟁 이후 폐허가 된 나라에서의 경험이다. 미국을 포함한 다국적 연합군(또 미국이다)은 2003년 이라크를 독재자로부터 구하고 민주주의와 평화를 심기 위해 침공했다. 그리고 이라크의 독재자 대통령을 축출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라크의 민주주의와 평화는 요원하다.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아이러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전쟁 후 복구 사업이 한참이던 2011년부터 3년간 한국 회사에 근무하며 이라크 바그다드에 머물렀다. 머무르면서 전쟁 후 폐허가 된 나라와 도시와 사람들을 직접 경험했다. 이라크의 한 여름 온도는 50도가 훨씬 넘어갔지만 일반 국민에게 전기는 하루에 5시간도 공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회사 덕택에 비싼 디젤 발전기를 돌릴 수 있었기 때문에 50도가 넘는 온도에서 전기가 끊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정에 대해서는 솔직히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런 나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같이 일하던 한 이라크 직원의 어린 조카가 아팠는데, 잦은 단전으로 아이가 너무 힘들어해서 우리가 근무하는 사무실로 데려와 며칠 머물렀다. 다행히 그 아이는 우리 사무실에서 머물며 나을 수 있었다. 그 아이의 열나는 머리를 걱정스레 짚었던 장면이 가끔씩 떠오른다. 지금의 나의 아이가 아플 때, 이라크의 그 아이가 생각난다. 아이의 열이 손을 타고 내 몸으로 전달되던 그때의 열감熱感도 여전히 생생하다. 


그리고 여기 세 번째 현재 진행형 이야기가 있다. 전쟁 중에 <전쟁일기>라는 책을 쓴 우크라이나인 올가 씨의 이야기다.



전쟁 전날 밤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이들이 잠든 후 남편과 나는 오랜만에 둘이서 오붓하게 대화할 시간을 가졌다. 남편은 수제 햄버거를 만들고 차를 끓여주었다. 늦은 저녁을 먹으며 우리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새로 구입한 아파트 수리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상상과 함께 아이들이 즐겁게 학원 생활을 해나가는 것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우리에게는 천 개의 계획들과 꿈이 있었다. 그렇게 우린 배부르고 행복한 채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 5시.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처음에는 폭죽 소리인 줄 알았는데, 사방에서 폭격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완전히 파악하지도 못한 채 나는 미친 듯이 서류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들 페자가 잠에서 깨어났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이에게 설명해주어야만 했다……. 그다음 딸 베라가 깼다. 나는 바로 아이들의 팔에 이름, 생년월일과 연락처를 적어주었다.


- 왜 적는 거야?

베라가 물었다.

- 우리, 지금 놀이를 하는 거야.

- 무슨 놀이?

- ‘전쟁’이란 놀이.


<전쟁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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