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직장인의 근로시간이 세계적으로 매우 긴 수준이라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실제로 OECD 통계를 찾아보니 항상 5위권 안에 들었고, 조사한 년도에 따라 달라지지만 OECD 회원국 평균보다 150시간 정도 깁니다.
그만큼 사무실에서 긴 시간 동안 희로애락을 오고 갑니다. 안타깝게도 희와 락은 거의 없고, 노한 상태이거나 슬픈 상태 즉,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 대부분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또 우울증 비율도 덩달아 증가합니다. 악순환입니다. 사무실에서 길게 일하는 것도 억울한데, 우울증이라니요…
저도 사실 우울증을 겪었고,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우울증은 완벽히 완쾌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합니다. 대부분 환경이 안 좋아지면 다시 우울증이 재발한다고 합니다.
우울증 경험 보유자인 저는 사무실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잘 안됩니다. 계속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양한 향수를 사무실에 갖다 놓고 뿌립니다. 집에서는 어린아이 때문에 공간도 부족하고, 아이에게 향수 냄새가 좋지 않을까 괜히 염려되어 집에 보관 중이던 향수를 사무실로 대부분 옮겼습니다.
사무실의 향수. 서랍에 몇 개 더 있습니다...
인사이드 아웃의 캐릭터처럼, 향수에 저만의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상쾌한 시트러스 계열은 '기쁨', 은은한 플로럴 향은 '희망', 묵직한 우디 향은 '용기', 시원한 아쿠아 계열은 '박력', 그리고 자연스러운 허브 향은 '호연지기'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중요한 보고 전에는 자신감을 주는 '박력' 향수를, 마음이 심하게 깨진 날에는 따뜻한 위로가 되는 '희망' 향수를 뿌립니다. 이처럼 꼰대가 사무실에서 다양한 향수를 뿌리면 장점이 많습니다.
1. 타인을 위한 배려: 너무 과하게만 뿌리지 않는다면, 좋은 향이 나는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2. 기분 전환: 취향과 기분에 따라 골라먹는 아이스크림처럼, 그 순간 기분에 따라 제가 임의로 지정한 향수를 뿌리면 기분 전환이 됩니다. 타인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지만 무엇보다 제가 뿌린 향수를 제가 좋아합니다. 가끔씩 킁킁 냄새를 맡곤 합니다.
3. 자존감 회복: 향수를 뿌리면 제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우울한 날에도 좋은 향기가 나는 저를 발견하면, 힘든 상황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4. 긍정적 기억 연결: 각각의 향수가 좋은 순간들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 향을 맡을 때마다 행복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향수에 관한 꽤 오래전 소설이 있습니다. 2008년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입니다. 원작의 인기에 힘입어 영화화도 되었는데요. 저는 영화는 보지 못했고, 소설로만 읽었습니다. 그래도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해 줄거리를 다시 찾아봤습니다.
주인공인 '그루누이'의 타고난 후각과 그의 삶에 대한 얘기인데요. 호불호가 갈리지만 저는 '향'이라는 주제로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에 놀라웠습니다.
그루누이는 모든 사물과 생물에게 저마다 고유의 '향'이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예를 들어 나무도 고유의 '향'이 있다는 거죠. 하지만 정작 뛰어난 후각을 가진 그루누이에게는 향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루누이는 "존재하는 것의 영혼은 향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향이 없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이 세상에서 낼 수 있는 최고의 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릅니다.
소설 줄거리를 찾아보니 오래전 소설을 읽었을 때 감정이 조금은 되살아납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이 생겼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 '향'을 가지고 있나…'
저는 고정된 '향'에 저를 가두고 정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강인한 우디 향처럼 단단하게, 때로는 산뜻한 시트러스처럼 발랄하게, 때로는 은은한 플로럴처럼 부드럽게 - 이처럼 다양한 '향'을 지닌 채 살아가고 싶습니다. 매일 아침 그날의 기분과 상황에 맞춰 향수를 고르는 작은 의식을 통해, 저는 사무실 스트레스에 맞서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