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우나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목욕 후에 마시는 빠유(바나나 우유)도 좋아합니다.
평일 저녁이든 주말 오후든, 사우나에 가면 늘 보는 풍경이 있습니다. 나이 지긋한 아재들이 평상에 앉아 'TV를 본다'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진지하게 '나는 자연인이다'를 시청하고 있죠.
처음엔 그저 한가한 아재들의 여가생활이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느 순간 저도 아재들과 삼삼오오 앉아서 빠유를 마시며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고 있더군요) 제 옆자리의 한 아재가 TV를 보며 뱉은 한마디가 제 귀에 쏙 들어왔습니다.
"아... 저게 사람 사는 거지."
이 한마디에 저는 찐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
마음속의 응어리가 씻겨 내려가는 듯한 그 감정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렇게 불렀죠.
퇴근 후 잠깐 짬을 내어 사우나에 온 저도, 주말을 맞아 피로를 풀러 온 다른 아재들도, 우리 모두 도시의 삶에 응어리가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고, 형광등 아래서 모니터와 눈치를 보며 살거나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도시에서 노동을 통해 살아가면서 쌓인 그 응어리 말입니다.
그런 우리 앞에 '자연인'이 나타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새소리를 듣고, 맨발로 흙을 밟으며, 직접 기른 채소로 밥을 지어먹는 사람. 서류 가방 대신 약초 가방을 메고, 구두 대신 맨발로 다니며, 엑셀 대신 호미를 다루는 사람.
무엇보다 부러운 건, 그들의 시간표입니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드는, 자연의 리듬에 맞춘 삶. 점심시간을 알리는 건 상사의 눈치가 아닌 배고픔이고, 퇴근을 결정하는 건 시계가 아닌 노을입니다.
자연인은 우리가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잡한 인간관계도, 끝없는 업무도, 쉴 새 없이 울리는 카톡도 없는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노동이 곧바로 결실이 되는 기쁨이 있습니다. 보고서를 쓰면 보고서로 끝나지만(보고서가 보고서로 끝나면 오히려 다행입니다. 보고서를 쓰면 욕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연인이 심은 씨앗은 식탁 위 반찬이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사우나의 아재들은 마치 로망을 보듯 자연인을 바라봅니다. 피곤에 절은 눈으로 화면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쉽니다.
"나도 저렇게 살아볼까..."
퇴직하면 산으로 들어가겠다는 말, 한 번쯤은 해보셨을 겁니다. 물론 대부분 실천하긴 어렵겠죠.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이 순간만큼은, 형광등 아래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자연인의 자유를 꿈꿀 수 있으니까요.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삶, 스스로의 노동이 곧바로 기쁨이 되는 삶, 자연의 시간 속에 잠든 삶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자연인이다'를 봅니다. 저기 화면 속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자유가 있고 한 번쯤 꿈꿔본 낭만이 있으니까요.
... 그리고 이제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형광등 아래든, 거리에서든, 어디서든 우리의 하루가 다시 시작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