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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선배들에게 배운 것

없습니다.

by 바그다드Cafe

결론부터 말하면 대기업 선배들에게 배운 것은 없습니다. 특히, 나이 차이가 많이 날수록, 대기업 생활을 오래 했을수록 배우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마치 오래 숙성된 김치가 신맛만 강해지는 것처럼요. 아니, 어쩌면 냉장고 구석에서 잊힌 채 말라버린 김치 같달까요? 가끔 회사 구내식당에서 나오는 그 김치입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10여 년 넘게 L기업과 S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주니어이던 시절에는 대기업 선배들이 정말 대단해 보였습니다. 좋은 학벌에 대기업에 오래 다닌 아우라까지... 마치 드라마 속 재벌 2세처럼 빛이 나는 것 같았죠. 신입 시절엔 그들의 걸음걸이만 봐도 '저게 바로 프로의 품격이구나!' 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심지어 그들이 커피 마시는 모습까지 따라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대리가 되고 과장이 되면서 그들의 비밀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화려한 아우라는 사실 회사 로고의 반사광이었을 뿐이더군요. 마치 알고 보니 슈퍼맨의 망토가 그저 할로윈 코스튬이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처럼요. 아침마다 보던 선배의 당당한 걸음걸이? 알고 보니 허리 디스크 때문이었답니다. 그 유명한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 사실은 노안 때문에 안경을 자주 고쳐 쓰는 거였죠.

실제로 그랬습니다. L기업에 다닐 때 눈여겨보던 후배가 있었는데, 어느 날 "여기선 내 영혼이 말라죽겠다!"며 스타트업으로 도망가듯 떠났습니다. 처음엔 다들 "또 한 명의 청춘이 야반도주했구나" 하고 혀를 찼죠. 그런데 웬걸, 지금은 정말 유명한 유니콘 기업의 부사장이 되었더군요. 반면 제가 아는 어떤 선배는 20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의자만 데우다가 의자와 한 몸이 되어버렸답니다. 심지어 그 의자에 엉덩이 자국까지 완벽하게 새겨졌다는 소문이... 이제는 그 의자가 퇴직하면 국립중앙박물관에 '조선 시대 대기업 관료의 흔적'이란 이름으로 전시될 것 같습니다.

대기업의 또 다른 묘미는 회의 문화입니다. 제가 본 어떤 선배는 회의 시간에 늘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동의의 표시가 아니라 졸음을 이기려는 몸부림이었답니다. "과장님, 이 안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으면 "음... 그건 좀 더 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라는 대답이 조직의 공식 매뉴얼이었죠. 이 대사는 마치 대기업판 '아무 말 대잔치'의 대표 멘트가 되었습니다.

우리 팀의 김 부장님은 특히나 회의의 달인이셨죠. 2시간짜리 회의를 소집해 놓고 첫 1시간 55분은 지난 주말 골프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 5분에 "자, 그럼 이대로 진행하시죠"라며 마무리하시는 게 특기였습니다. 물론 아무도 무슨 안건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골프 스코어만큼은 정확히 기억하게 되었죠.


아침 회의도 있습니다. 어떤 상무님은 늘 아침 8시 30분 회의를 고집하셨는데, 미스터리한 건 상무님 말고는 아무도 그 회의가 왜 필요한지 모른다는 거죠. "오늘 아침 회의는 어제저녁 회의에서 못한 얘기를 하기 위한 자리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기신 분이기도 합니다.

식사 자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회식 때마다 들려주시는 선배들의 '옛날이야기'는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 같았어요. "그땐 말이야..."로 시작해서 "요즘 애들은 모를 거야"로 끝나는 이야기들. 심지어 어떤 선배는 같은 이야기를 분기마다 한 번씩 하는데, 계절마다 디테일이 조금씩 달라지는 게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신기했습니다. 이래도 회사가 돌아가는게. 그리고 알아냈습니다. 그럼에도 대기업이 돌아가는 이유를요.


대기업은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조직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충 때워도 대기업(혹은 국방부)의 시계는 돌아가고 월급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곳에서 살아남은 선배들은 조직에 순응하다가 결국 회사 로고가 찍힌 도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자, 이제 아시겠죠? 도장한테 뭘 배우겠습니까? 도장은 찍히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잖아요. 가끔 도장 밖으로 삐져나온 잉크처럼 통제를 벗어난 행동을 하면, 그건 곧 '부적절한 행위'로 낙인찍히죠.

중소기업에 와서 보니 비로소 보입니다. 여기 사람들은 최소한 도장이 되진 않았더군요. 가끔은 삐뚤어진 글씨를 쓰더라도, 자기만의 사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수도 하고, 때론 엉뚱한 아이디어를 내기도 하지만, 적어도 살아있다는 증거이지 않을까요? 도장과 사인의 차이는 바로 그거죠. 하나는 찍히고, 하나는 써진다는 것.

아, 그래도 한 가지 배운 게 있네요. 바로 '회사에서는 진담을 농담으로 포장하는 기술'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그 기술을 써먹고 있다는 건 비밀입니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 속해있는 도장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어떤 도장은 같은 자리만 찍히기를 고집하고, 어떤 도장은 새로운 곳에 찍히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거죠.

PS. 이 글을 읽고 계신 대기업 선배님들, 농담입니다. 사실 저도 언젠가는 편안한 의자가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네요. 그때는 제가 쓴 이 글을 보며 웃고 있겠죠. 물론 그때쯤이면 저도 완벽한 도장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PPS.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신 중소기업 대표님, 저 아직 도장 안 됐습니다. 진짜입니다! 아직은 삐뚤빼뚤한 사인을 쓰는 중이에요.

PPPS. 그리고 이 글에 나온 모든 인물과 상황은 실제 인물과 무관합니다. 단, 제 엉덩이 자국이 난 의자는 예외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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