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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임원이라는 공허한 약속

상후하박上厚下薄

by 바그다드Cafe

상후하박上厚下薄이라는 한자가 있습니다. 윗사람에게는 '후하고(두툼하게) 아랫사람에게는 박하다(얇게)'는 뜻입니다. 마치 삼겹살집에서 사장님 접대는 두툼한 생삼겹으로, 신입사원 회식은 얇디얇은 냉동삼겹으로 하는 것처럼 말이죠. 저는 이 한자가 현시점 한국 회사와 더 나아가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도 임원이 돼 봐라, 젊어서 고생한 것들은 다 보상이 되고 남을 거다."


제가 3군데의 회사를 거치면서 몇몇 임원들에게 들었던 얘기입니다. 상후하박의 정점에서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사실 제가 주니어 시절에는 저 말만큼 동기부여가 되는 말도 없었습니다. '그래, 20년만 빡세게 고생하면 나도 저런 임원이 돼서 떵떵거릴 수 있을 거야. 나도 언젠가는 회사 돈으로 골프 치고 (회사차)그랜저를 탈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직장인 15년 차가 된 지금, 저런 소리를 하는 임원이 있다면 와닿지 않습니다. 마치 로또 당첨자가 "열심히 복권 사면 너도 당첨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왜 그럴까요? 도대체 15년이라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제가 경험했던 회사의 임원들이 그렇게 대단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심지어 대기업조차도)

물론 임원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열심히 일했겠지만, 제가 보아온 대부분의 임원들은 운이 좋았거나 정치를 잘했던 것이 더 컸습니다. 마치 학창 시절 반장선거에서 인기투표로 뽑히는 것처럼요. 실력과 성과만으로는 임원이 되기 어려운 것이 한국 회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실력은 뛰어나지만 정무적 감각이 부족해 과장, 차장에서 머무는 직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공부만 하다가 반장 한 번 못 해본 수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 임원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 비합리적입니다.

한국 기업의 승진 구조는 여전히 연공서열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마치 김치처럼 오래 묵을수록 높이 평가받는 시스템이죠. 또한 평가 기준이 모호하고 불투명합니다. '이번에는 왜 A가 아닌 B가 승진했을까?' 하는 의문이 끊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때로는 단순히 윗사람의 '눈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승진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어쩔때는 마치 왕의 눈에 든 신하가 갑자기 승진하는 조선시대같기도 합니다.


3. 임원이 되더라도 여전히 윗사람의 '을'입니다.

사실 임원이 된다고 해서 갑질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임원도 더 높은 임원이나 오너 앞에서는 여전히 '을'이죠. 마치 러시아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한국 회사에서는 항상 자신보다 더 큰 '갑'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어떤 임원들은 아래 직원들에게 더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받은 스트레스를 아래로 분출하는 거죠. "나도 이만큼 당했으니, 너희들도 참아라"는 식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겁니다.


4. 무엇보다 이런 구조가 회사의 발전을 저해합니다.

'상후하박'의 문화는 조직의 건강한 성장을 막습니다. 실력 있는 젊은 인재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무시되며, 결국 회사는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처지게 됩니다. 마치 구형 스마트폰에 최신 앱을 깔려고 하는 것처럼요.


반면 독일에는 이런 한국의 상후하박과는 정반대인 '마이스터(Meister)' 제도가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현장의 기술자가 최고의 대우를 받습니다. 마이스터는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서 존중받으며, 그에 걸맞은 대우도 받습니다. 임원이나 관리자보다 더 높은 연봉을 받는 마이스터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독일 회사들이 한국처럼 회사원을 갈아 넣는 문화가 아님에도, 제조업 강국의 위상을 수십 년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문화 덕분입니다. 실무자들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그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임원이 되는 것만이 성공이라고 여기는 한국의 기업 문화와는 큰 대조를 이룹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연공서열이 아닌 실력과 성과 중심의 평가, 투명하고 공정한 승진 제도, 그리고 모든 직급에 걸쳐 합리적인 보상 체계가 필요합니다. 특히 MZ세대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대들은 더 이상 '고생하면 나중에 보상받는다'는 논리에 설득되지 않습니다.


"갓생이 소중한데 미래에 대한 막연한 헛된 약속만 믿고 청춘을 바치라고요? 그리고 그 약속이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않는데요?"


한국 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려면, 이런 구시대적인 '상후하박' 문화부터 혁신해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독일의 사례처럼 실무진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적절한 보상을 제공하는 문화가 정착될 때, 우리 기업도 진정한 글로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계속 "임. 원. 님. 커피 한잔 더 드릴까요?"를 외치고 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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