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에서 만난 대사님의 직장 상사 썰
저는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일했습니다. 당시 이라크는 2003년 연합군 침공 이후, 끊임없이 내전이 이어져 정상적인 여행이 금지되었던 위험한 나라였습니다. (슬픈 건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제가 있을 때 보다 그리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여행금지국가이다 보니 이라크의 출입국을 대한민국 정부에서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사실상 저처럼 회사일이 아니면 머물 수 없었고, 이라크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의 동향을 대사관에서 철저히 관리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적다 보니 대사님께서 한국인들을 모두 불러서 안부도 물을 겸 간담회 자리를 겸한 식사 자리를 종종 만들곤 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그 자리가 간담회보다는 '한식 먹방'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라크에서 제대로 된 한식을 먹을 기회가 별로 없던 저는, 어색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대사님이 불러주는 간담회 자리가 은근히 기대되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김치찌개 냄새에 정신이 팔려있던 차에, 대사님께서 들려주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10명 내외가 모이던 소인원 간담회 자리인지라 당시 사회 초년생의 20대인 저도 고위공직자 대사님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마치 동네 큰 어른 댁에 초대받아 밥 먹으러 온 느낌이었달까요? 대사님의 말 중에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대사님의 당시 직장 상사(이명박 대통령)와 얽힌 이야기입니다.
대사님께서 주이라크 한국 대사로 임명되고, 임명권자인 직장 상사와 다른 대사님들과 함께 자리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 자리에서 직장 상사는 대뜸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이라크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
이게 무슨 중학교 지리 시험도 아니고... 이라크 대사로 임명된 정통 외교관에게 이라크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물어본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대사님의 직장 상사는 70~80년대 샐러리맨의 신화로, 현대건설에서 사장까지 역임하면서 특히 중동에서 대단한 활약을 했다고 알려진 인물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이 나옵니다. 대사님의 직장 상사는 자랑스럽게 "내가 바그다드에서 자전거 타고 다녔는데..." 하면서 70~80년대 이라크 이야기를 풀어냈다고 합니다. 마치 옛날 학교 다닐 때 "난 매일 눈길에 5km 걸어서 학교 다녔어!" 하시는 부모님 같달까요? (저희 아버지가 공부 안 하던 저를 보며 어렸을 때 자주 하던 말입니다) 다른 나라에 임명된 대사님들도 같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이라크에 임명된 본인에게 특히 질문 공세가 이어져 당혹스러웠고, 끝내 훈계와 훈수로 이어졌다는 얘기였습니다.
2011년에는 그래도 대사님의 직장 상사(이명박 대통령)의 인기가 식지 않았던지라, 간담회에 모인 그 누구도 함부로 대사님의 직장 상사에 대해 얘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허허허' 웃고는 가벼운 에피소드 중 한 가지로 넘어가는 분위기였습니다. 저도 그 당시에는 오랜만에 먹는 한식에 눈이 멀어(특히 김치찌개가 정말 맛있었습니다),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의 깨달음
그 후로 15년 가까이 흐른 지금, 가끔씩 그때 대사님의 직장 상사 얘기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동시에 제가 겪어온 모든 '나 다 해봐서 아는데~' 스타일의 상사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대사님의 직장 상사는 전형적인 '내가 다해봐서 다~안다' 유형의 직장 상사입니다. 본인의 경험에 대한 자부심이 큰 경우에 보통 이런 류의 상사가 됩니다.
요즘 제가 이 오래된 기억을 자꾸 떠올리는 이유는, 고민이 많기 때문입니다. 바로 급변하는 시대에 직장인으로 살아남기 위한 고민입니다. ChatGPT도 모르던 시절의 경험을 자랑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과연 저렇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다해봐서 다~안다' 유형의 직장인은 앞으로 더더욱 살아남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내가 다해봐서 다~안다'는 과거의 경험에 기대는 것인데, 과거의 경험이 예전처럼 가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과거의 경험이 발목을 잡아 성장을 가로막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마치 스마트폰 시대에 "나 삐삐 엄청 잘 썼는데!"라고 자랑하는 것과 비슷하달까요?
지금 생각해 보니, 15년 전 대사님의 직장 상사도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1970년대의 이라크와 2010년대의 이라크는 완전히 다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이라크는 중동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치안이 안정되어 있었고, 외국인들이 예상외로 자유롭게 드나들며 사업을 할 수 있었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바그다드 거리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녀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 이라크는 전쟁이 끝났음에도, 계속되는 내전으로 곳곳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는 나라였습니다. 자전거는 고사하고, 슈퍼를 갈 때도 방탄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습니다. (혹시 자전거를 타고 슈퍼마켓에 가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되시나요?) 치안이 이럴진대, 정치 상황은 완전히 달랐을 것입니다. 요컨대 1970년대 이라크의 경험으로 2011년에 이라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훈수와 훈계를 할 만한 게 그리 없습니다.
급변하는 시대, 직장인의 새로운 자세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경험'이라는 말에 갇혀있을 수 없습니다. "나 옛날에..."로 시작하는 모든 조언을 의심해봐야 할 시대가 왔습니다.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자세입니다:
유연한 사고방식: 과거의 경험을 절대적 진리로 여기지 않고, 상황과 맥락에 맞게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해왔으니까'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이렇게 하면 어떨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1970년대 이라크와 2010년대 이라크가 다르듯, 2020년대의 직장 생활도 이전과는 다릅니다.
공감과 소통능력: 세대 간, 문화 간의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다양한 관점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일방적인 지시나 훈계가 아닌, 상호 이해와 협력을 통한 문제해결이 필요합니다. "내가 너만 할 때는..."이라는 말 대신 "너의 생각은 어때?"라고 물어볼 줄 알아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의 리더십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경험을 자랑하는 리더가 아닙니다. "나 옛날에 자전거 타고 다녔는데..."라는 말로는 더 이상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고, 다양한 의견을 경청할 줄 아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리더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모든 직장인들이 이러한 자세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15년 전 이라크에서의 그 저녁 식사 자리는 (맛있는 김치찌개와 함께)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리더십과 직장인의 자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소중한 교훈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라크'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현재와 미래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점일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경험에 갇혀있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며, 끊임없이 성장하는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디 앞으로는 누군가에게 "나 옛날에 거기서 자전거 탔는데..."라는 말은 하지 맙시다. 특히나 그 사람이 방탄차를 타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라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