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직장인 공부가 불가능한 이유

그럼에도, 중국어

by 바그다드Cafe

"내일부터 공부한다"


대한민국 직장인에게 교통체증보다 더 익숙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미루는 습관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직장인 3대 허언 중 마지막 하나인 "내일부터 공부한다"라는 말입니다. 왜 우리는 이 결심을 항상 내일로 미루는 걸까요?


퇴근 후의 냉혹한 현실


평일 오후 7시, 늦은 퇴근 후 지하철에 몸을 싣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영어 학습 앱을 다운받고, 토익 시험 일정을 확인합니다. '다음 달에 시험 봐야겠다'는 결심과 함께 집으로 향합니다.


집에 도착하면 이미 저녁 8시 30분. 간단히 저녁을 먹고 샤워를 마치면 9시 30분. 이제 공부할 시간입니다.


그런데 소파에 앉자마자 유튜브 알고리즘의 무차별한 유혹이 시작됩니다.


"오늘 하루 정말 고생했어. 잠깐만 쉬고 공부해야지."


넷플릭스의 자동 재생 기능과 유튜브의 '다음 동영상' 기능은 현대인의 의지력을 시험하는 가장 강력한 장치입니다. 15분만 보려던 영상이 어느새 2시간이 되고, 시계는 이미 자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제 피곤한데... 내일부터 진짜 시작해야지."


공부와 일의 악순환


대한민국 직장인에게 '공부'는 이중적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자기 계발의 수단이자, 동시에 또 다른 '일'처럼 느껴집니다.


이미 하루 종일 회사에서 두뇌를 사용하고 온 직장인에게 퇴근 후 추가적인 정신노동은 큰 부담입니다. 보고서를 작성하고, 엑셀 시트를 분석하고, 끝없는 이메일을 처리한 뇌는 더 이상의 정보 처리를 거부합니다.


"하루 종일 일했는데, 이제 또 공부라니..."


특히 업무와 관련된 공부(자격증, 업무 관련 서적)는 더욱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마치 퇴근 후에도 회사 일을 계속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현대 직장인의 번아웃 증후군과 일-공부의 경계 모호성은 우리의 공부 의지를 지속적으로 약화시킵니다.


성과 없는 노력에 대한 두려움


"영어 공부 3년 했는데 외국인 만나면 여전히 말 한마디 못 해요."


"자격증 공부했지만 결국 떨어졌어요."


"독서모임 가입했다가 책 한 권도 못 읽고 탈퇴했어요."


많은 직장인이 과거의 실패한 공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는 데 심리적 장벽으로 작용합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은 시작조차 어렵게 만듭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부릅니다. 반복된 실패 경험이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의욕을 저하시키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실패를 피하기 위해 시작 자체를 미루게 됩니다.


"공부해 봤자 어차피 안 될 거야. 그냥 내일부터 해야지."


취미와 공부 사이의 경쟁"


현대 직장인의 여가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두고 취미와 공부가 경쟁합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완주, 인스타그램 스크롤, 모바일 게임, 웹툰 보기... 이런 활동들은 즉각적인 만족감을 주는 반면, 공부는 지연된 보상을 제공합니다. 뇌는 즉각적 보상을 선호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 경쟁에서 공부는 종종 패배합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웹툰 보고 자야겠다. 내일부터 진짜 토익 공부 시작!"


더구나 소셜 미디어와 스트리밍 서비스는 사용자의 시간을 최대한 끌어모으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책장에 꽂힌 토익 책은 점점 더 멀게만 느껴집니다.


새로운 공부 트렌드의 유혹


"요즘은 파이썬이 대세더라."


"이제 AI 관련 지식이 있어야 살아남는대."


"디지털 마케팅으로 전향하는 사람들이 많아."


직장인들 사이에서 공부 트렌드는 계절처럼 변합니다. 작년에는 빅데이터였다가 올해는 AI가 되고, 내년에는 또 다른 키워드가 등장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트렌드가 우리의 학습 방향성을 지속적으로 흔든다는 점입니다. 한 가지를 깊이 공부하기 전에 새로운 트렌드가 등장하면, 우리는 '나도 저거 공부해야 하나?'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이런 방향성 상실은 학습 의지를 약화시키고,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SNS 속 타인의 성취와 비교


인스타그램에서는 친구가 토플 만점 인증샷을 올립니다. 링크드인에서는 대학 동기가 해외 MBA 합격 소식을 전합니다. 페이스북에서는 전 직장 동료가 창업 성공 스토리를 공유합니다.


소셜 미디어는 타인의 성취를 지속적으로 노출시키며 비교를 유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타인의 결과만 보고 과정은 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흘린 땀과 시간, 실패의 순간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쟤는 저렇게 성공했는데 나는 뭐 하고 있지?" 이런 생각은 처음에는 자극제가 되지만, 지속되면 자기효능감을 떨어뜨립니다. 시작도 하기 전에 타인과 비교하며 좌절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내일부터 진짜 열심히 해야지."


꼰대의 공부법


그럼에도 저는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바로 '틈새 시간 활용'을 통한 중국어 공부입니다. 사실 저는 몇 년 전부터 몇 번이나 중국어를 공부하다가 포기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이유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죠. 의지 부족, 내일로 미루는 습관,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유행에 민감한 공부를 쫓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장 필요 없는 중국어 공부를 하다가 포기하기를 반복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유행에 쫓기는 대신, 저의 커리어와 성향을 고려해서 꾸준히 중국어를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실천 방법이 바로 틈새 공부입니다.


출퇴근 시간에 중국어 듣기, 짧은 휴식 시간에 중국어로 중얼거리기, 자기 전에 틈틈이 중국어 쓰기 연습. 이렇게 일상의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중국어를 공부할 수 있는 툴이 너무나 훌륭해 마음만 먹으면 공부할 수 있습니다)

원노트에 전자필기로 중국어 필사를 하면 재밌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파편화된 학습이 효과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꽤 효과가 있습니다.


첫째, 심리적 부담이 줄었습니다. "오늘 2시간 동안 중국어 공부해야 해"라는 부담감 대신 "지하철에서 듣고, 자기 전에 조금만 쓰자"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연속성이 생겼습니다. 지하철에서 듣기, 침대에서 쓰기 등은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오늘은 너무 피곤해"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이 정도 시간은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자연스러운 확장이 일어났습니다. 가끔은 중국어 표현이 재미있어서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많은 문장을 연습하게 되었습니다. 의무감이 아닌 호기심으로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성취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새로운 단어와 표현을 익히면서 "나는 정말로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내일이 아닌 지금, 2시간이 아닌 15분부터


"내일부터 공부한다"가 허언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 완벽한 시작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피곤하지 않은 날, 충분한 시간이 있는 날, 의지력이 충만한 날... 그런 완벽한 날은 오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가 아니라 '얼마나 자주' 공부하는지입니다. 매일 15분씩 꾸준히 하는 공부는 월요일에 3시간 몰아서 하고 다음 주까지 잊어버리는 것보다 효과적입니다.


직장인 3대 허언을 깨는 비결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실행할 수 있는 작은 실천에 있습니다. 술을 완전히 끊는 대신 한 잔만 마시기, 극단적인 다이어트 대신 점심 산책하기, 그리고 몇 시간의 공부 대신 15분만 시작하기.


내일이 아닌 오늘, 완벽함이 아닌 지속성, 그리고 거창한 계획이 아닌 작은 습관. 이것이 직장인 3대 허언에서 벗어나는 진짜 비결입니다.


... 아, 그런데 오늘은 좀 피곤하네요. 내일부터 이 에세이대로 실천해야겠습니다. (농담입니다!)


p.s <后来的我们> 제가 가장 좋아하는 중국영화 제목입니다. <먼 훗날 우리>로 한국에서는 번역되었는데, 훗날 자막 없이 이 영화를 다시 감상하는게 제 인생의 작은 과업 중 하나 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