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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야근하며 만드는 PPT

슬라이드에 갇힌 직장인

by 바그다드Cafe

아래 글은 저의 직장인 지인의 하소연을 재구성해서 만든 픽션형 오컬트 에세이입니다.


2025년 봄, ChatGPT는 계약서를 써주고, Midjourney는 광고 이미지를 만들어주며, Notion AI는 회의록을 요약해 줍니다. 세상이 이렇게까지 변했는데… 저(저의 지인)는 여전히 금요일 밤 9시에 “회사소개서 개정 버전”을 만들고 있습니다.


슬라이드에 묻힌 내 청춘


“슬라이드는 가볍게 참고용으로만 만들면 됩니다.”


기획팀장님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입사 3개월 차 신입이던 저는 정말로 ‘가볍게’ 만들었습니다. 그 PPT는 한 시간도 안 돼서 전면 수정되었습니다. 그날 저는 알았습니다. 슬라이드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다만 ‘상사의 취향’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이후로 저는 색깔과 폰트, 애니메이션 효과에 목숨을 걸게 됩니다. Arial과 나눔고딕 사이에서 인생의 방향성을 고민하고, 도형 정렬 하나 삐끗하면 인생이 삐끗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입니다. 눈치 빠른 선배는 배경색만 봐도 저의 감정 상태를 읽습니다.


“오늘 좀 우울하구나? 배경이 파스텔 톤이네.”


PPT와 함께 자란 사람들


1984년생, 우리 세대는 파워포인트와 함께 성장했습니다. 2000년대 대학생 시절, 발표의 핵심은 ‘디자인’이었고, ‘애니메이션 날리기’가 곧 창의력이었습니다. 발표보다 더 오래 걸린 것은 슬라이드 디자인이었고, 실제로 말은 더듬었지만 PPT는 유려했습니다.


사회에 나와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대기업에선 ‘보고서’가 곧 슬라이드였고, 상사의 피드백은 늘 비슷했습니다.


“왜 이렇게 허전하지?”

“여기 아이콘 하나만 넣어봐.”

“왜 이거랑 이거랑 정렬이 다르지?”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PPT는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권력의 시각화라는 것을.


AI도 포기한 PPT 감각


최근 ChatGPT에게 물었습니다.


“마케팅 보고서용 슬라이드를 만들어줘.”


결과는 형식적이고, 뻔하고, 무색무취한 PPT였습니다. 딱히 틀린 건 없는데, 어디서 많이 본 느낌. 마치 누가 만든 졸업식 축사 원고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걸 상사에게 보여줬다가 들은 말:


“이건… 영혼(靈魂)이 없어.”


AI가 못해내는 게 여기 있었습니다. 슬라이드의 감정. 상사의 기분, 팀장의 스타일, 전무님이 좋아하는 ‘한 줄 요약’. 이 모든 걸 반영하는 건 아직 사람뿐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상사의 비위를 맞추고 파악하는 부하직원만이 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결국 저는 다시 폰트를 바꾸고, 말줄임표의 개수를 조정하고, 도형을 0.1cm씩 이동시켰습니다. 이쯤 되면 ‘디자인’이 아니라 ‘굿판’에 가깝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파묘의 ‘화림’이 되어야 합니다.



아마존에서는 PPT를 만들지 않는다


아마존의 창업주 Bezos는 회의에서 PPT를 금지했습니다. 대신, 모든 안건은 6페이지짜리 내러티브 메모로 정리합니다. 회의는 그 문서를 조용히 함께 읽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PPT처럼 보여주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진짜로 생각한 것을 정리한 글이 먼저 나옵니다. 시각화보다 논리. 애니메이션보다 내러티브.


화려한 인포그래픽 없이도, 진짜 아이디어는 살아남습니다. 도형의 정렬 대신 아이디어의 구조를 맞춥니다. 핵심을 말하기보다, 핵심을 써야 합니다.


우리 조직의 회의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슬라이드 디자인을 위해 밤을 새우고, 아이콘 하나에 감정을 싣고, ‘보기 좋은 PPT’를 위해 본질을 포장합니다.


아마존의 회의 문화는 묻습니다.


“PPT 없이도 설명할 수 있는가?”

“말이 아닌 글로 정리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게 정말 중요한 내용인가?”


PPT라는 무의식


PPT는 우리의 업무를 시각화하는 도구인 동시에, 우리 세대의 무의식을 반영합니다.

불안해서 문장을 짧게 자르고,

눈치 보여서 도형은 균등분할하고,

사실보다는 정서를 강조하며, 진실보다 기획안을 만듭니다.


우리는 슬라이드에 아이디어를 얹기보다, 눈치를 얹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보이는 일’을 하느라, ‘보이지 않는 생각’을 잃어갑니다.


슬라이드에서 걸어 나오기 위해


이제는 생각합니다.

정말 슬라이드가 필요할까?

‘그림’보다 ‘그림자’에 집중하는 이 문화 속에서, 우리는 정말 핵심에 닿고 있는 걸까?


슬라이드를 예쁘게 만들 시간에, 보고서의 본질을 더 깊이 파악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AI가 초안을 만들고, 나는 편집자로서 핵심을 다듬는 방식으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언젠가 후배가 저에게 이렇게 말하길 기대합니다.

“팀장님, 오늘 발표는 슬라이드 없이 말로만 하겠습니다.”


그날이 오면, 저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겠습니다. *


*심훈 <그날이 오면>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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