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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팀장의 지독한 착각

바다를 주시하는 새끼 고래

by 바그다드Cafe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90년대생 지인 B(대리 짬밥)를 만났습니다. 저보다 10살쯤 어린 친구지만, 업무 분야도 다르고(B대리는 재무), 성격도 달라 대화를 나눌 때마다 오히려 제가 배우는 게 많은 친구라 번호표 뽑고 만나기를 청하는 친구입니다.


그날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B대리는 팀장과 식사하거나 술자리를 함께하는 것이 너무 싫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대기업은 아니지만, 중소기업에서 '영업·전략·구매·투자·해외사업·인사·총무·물류·대외협력' 등등 각종 모듈을 한 몸에 이식한 팀의 장을 맡고 있기에 순간 멈칫했습니다. (월급은 훨씬 적지만, 같은 팀장으로서)


'왜 그럴까? 나도 조심해야겠다.'


B대리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든, 팀장님의 대화는 결국 자기 자랑으로 흘러가요."


"나처럼 자동차 대기업 팀장이 되려면 말이지…"


"나처럼 자동차 대기업 팀장을 하게 되면 좋은 점은…"


"너희도 열심히 하면 나처럼 자동차 대기업 팀장이 될 수 있어…"


점심시간이든 회식자리든, 아니면 그냥 일 얘기하다가도 결국엔 '나처럼(라떼와 한 세트)'으로 끝나는 이야기. 처음엔 웃으며 넘기다가, 나중엔 피하게 된다고 합니다.


B대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요, 팀장님은 자동차 대기업 팀장 말고는 지금 뭘 하고 계시는데요?'


새끼 고래에게 어항을 추천하는 조언


제가 아는 B대리는 누구보다 정보에 밝고, 자기 계발에 열심히며, 장기적으로는 자신의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열정 있는 친구입니다. 지금 다니는 회사가 아무리 국내 최고 대기업이라 해도, 그는 거기서만 안주할 생각이 없습니다. (물론, 업무 성과도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 그에게 '나처럼 대기업 팀장이 되어라'는 조언은,

마치 바다를 꿈꾸는 새끼 고래에게 어항을 추천하는 조언과 같습니다. 물론, 어항을 좋아하는 물고기에게는 최고의 조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후배가 어항을 꿈꾸는 건 아닙니다. 누군가는 더 멀리, 더 깊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싶어 합니다.


권위는 사라지고, 조언은 불신받는다


팀장이 자신이 걸어온 길을 정답처럼 말하고, 그 길을 그대로 따르라고 강요하는 순간, 그 조언은 낡아버립니다.


지금은 비디오테이프가 성행하던 시절이 아닙니다. 평생직장이 당연했던 시대도 끝났습니다. 누구나 유튜브로 세계 최고 AI 반도체의 가죽잠바 입은 CEO의 인터뷰를 보고, 스탠퍼드가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스탠퍼드 졸업식에서 연설하는 스마트폰 단군 할아버지를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제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렇게 했지만, 너는 다르게 해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신뢰를 받습니다. 조언이 많을수록 권위가 사라지는 시대. 그게 지금 우리가 사는 조직의 현실입니다.


리더는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다


이제 팀장의 역할은 후배들에게 길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어떤 길을 가고 싶어 하는지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해온 방식'이 정답이라는 전제부터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열린 태도야말로 이 시대 팀장이 가져야 할 가장 큰 미덕입니다.


요즘 후배들은 팀장의 말보다 '태도'를 먼저 봅니다. 말만 멋있게 해 놓고 피드백은 무시하고, 소통을 외치면서 회식은 강제하고,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후배의 새로운 시도를 불편해하는 팀장은 결코 따르지 않습니다.


팀장의 착각을 멈추는 순간, 진짜 리더십이 시작된다


조직을 이끄는 자리에서 가장 위험한 생각은 '나처럼 하면 된다'는 착각입니다. 그 착각에서 벗어나는 순간, 진짜 리더십이 시작됩니다. 후배는 당신처럼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자기만의 길을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그 여정을 지켜봐 주고, 묵묵히 들어주고, 필요할 때 단 한 마디를 건네줄 줄 아는 사람. 그게 요즘 시대가 원하는 진짜 팀장입니다.


비록 대기업의 팀장은 아니지만, 중소기업에서 영업·전략·구매·투자·해외사업·인사·총무·물류·대외협력팀장의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이 한 문장만 기억하십시오.


"팀장의 미덕은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입니다."


말을 줄이고 귀를 여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팀장'이 아니라 진짜 '선배'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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