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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그그... 나이들면 단어가 생각 안나는 이유

금주를 부탁해

by 바그다드Cafe

회의 중이었습니다. 분명 입까지 올라온 단어가 있었는데...


"그, 그, 그 뭐죠? 아… 그거 있잖아요, 어… 그…"


팀원들은 눈빛으로 응원해 줍니다.


'또 시작이군요, 팀장님...'


분명 삼십 대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사십 대가 되고, 언젠가부터 자꾸만 말끝이 흐려집니다. 예전에는 팡팡 튀어나오던 단어들이, 요즘은 '그그그'로 시작해 '아… 됐다'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졌죠. 왜 이런 걸까요? 그냥 늙어서 그런 걸까요?


단어가 도망가는 뇌의 비밀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혀끝 현상(Tip-of-the-tongue phenomenon)', 일명 ToT라고 부릅니다. 단어가 머릿속에 있긴 한데, 입 밖으로만 안 나오는 아주 고약한 증상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뇌 속 단어 저장고와 그걸 꺼내 쓰는 경로 사이의 연결이 느려지면서,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쉽게 말하면, 단어는 머릿속에 분명히 있는데 '검색 속도'가 떨어진 거죠. 마치 오래된 스마트폰에서 앱을 누르면 한참 있다가 반응하는 것처럼요. 성능이 완전히 고장 난 건 아닌데, 뭔가 예전만 못한 느낌… 정확히 그겁니다.


바로 이 느낌.


진짜 원인은 '기억력'이 아니라 '주의력'


놀라운 건, 이 문제의 본질은 기억력 자체가 아니라 주의력의 분산에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개의 탭을 켜놓은 브라우저처럼 살아갑니다. 끊임없는 알림, 미팅, 보고서, 집안일, 아이 돌보기… 뇌가 집중할 틈 없이 여기저기 시선을 뺏깁니다. 그런 상태에서 단어를 꺼내 쓰는 능력은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요. 단어가 '잊힌 것'이 아니라, 그냥 '나올 자리를 못 찾고 있는 것' 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뇌를 멈칫하게 만드는 결정적 방해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음주입니다.


적당한 술은 긴장을 풀어주고, 회식자리에서의 인간관계를 다지기에도 좋죠. 하지만 문제는 '적당함'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과음은 뇌의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hippocampus)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특히 단어 회상 능력과 언어 유창성을 떨어뜨립니다.


술 마신 다음 날 아침,


"어제 뭐라고 했지?"


"누구랑 무슨 얘길 했더라?"


이런 말이 입에서 자주 나온다면 단순한 건망증이 아니라, 어젯밤 알코올이 가져간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뇌의 회복 능력은 떨어지기 때문에, 반복된 음주는 '그그그' 현상을 더욱 빈번하게 만듭니다. 한마디로, 매일 한 잔의 맥주가 내일 회의의 침묵을 부를 수 있는 셈이죠.


단어는 훈련으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단어는 그냥 기억에만 맡기면 점점 희미해집니다. 중요한 건 '저장'보다 '불러오기 훈련'입니다. 아래 세 가지를 일상에서 실천해 보세요. (저부터요...)


1. 자주 말하기


책을 읽고 내용을 소리 내어 요약해 보세요. 혼잣말도 좋습니다. 말하는 순간 뇌는 언어 회로를 다시 활성화시킵니다. 말하지 않으면, 입도 닫히고 단어도 닫힙니다.


2. 자주 써보기


글쓰기는 최고의 언어 회상 훈련입니다. 일기든, 메모든, 회의 요약이든 쓰는 행위는 '머릿속 단어 서랍'을 열게 만듭니다.


3. 새로운 언어 배우기


저는 퇴근 후 30분씩 중국어 단어를 외웁니다. 예전에는 아랍어를 공부했고, 미얀마 시멘트 공장에서 일하며 미얀마어도 조금 배웠습니다. 여러 언어를 배우면서 느낀 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 기존 언어 능력까지 확장시킨다는 점입니다. 즉, 언어를 배우면 뇌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사고 체계를 받아들이고, 그 자극이 기존의 기억 경로를 더욱 유연하게 만들어줍니다. 뇌의 스트레칭 같은 거죠.


기억력도 유통기한이 아니라 '사용기한'이다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이 들수록 자연스러운 변화이자, 관리해야 할 능력일 뿐입니다. 기억력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덜 쓰면 녹슬고, 자주 쓰면 다시 반짝이는 것'입니다.


'그그그'에서 '아, 맞다!'로 전환되는 그 순간을 위해, 오늘도 단어를 꺼내고, 쓰고, 말해보는 연습을 해보세요.


그리고 오늘 밤, 맥주 캔을 들기 전에 한 번만 생각해 보세요.


"이 한 캔이, 내일 내 단어 하나를 가져갈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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