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12년, 중소기업 3년, 그리고 그다음
직장 생활 15년 차입니다. 대기업에서 12년을 보냈고, 현재는 중소기업에서 3년째 근무 중입니다. 적지 않은 시간이고, 적지 않은 경험입니다.
“그래도 잘 버텼네.”
“적응력 하나는 인정이지.”
“이쯤이면 자리 잡은 거 아냐?”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과거의 저였다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 겁니다. 그런데 요즘, 머릿속에 자꾸 맴도는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그럼 이제, 뭐 하지?”
“이다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지?”
1막은 대기업 입사였습니다. 입사만 하면 인생이 어느 정도는 자동 진행될 줄 알았습니다. 열심히 하고, 조직에 충성하고, 말 잘 듣고, 밤새 보고서도 써내면 자연스럽게 ‘커리어’라는 게 저절로 따라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될 대로 버텼습니다. 회사가 시키는 대로, 선배가 말하는 대로. 누가 뭐라 하기 전에 먼저 자료를 만들고, 분위기를 살피며 회의실을 오갔습니다.
2막은 조직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힌 시기였습니다. 일보다 사람, 실력보다 분위기, 성과보다 타이밍. 그 무형의 것들 속에서 균형을 잡는 게 훨씬 어려웠습니다. 보고는 말장난 같아졌고, 전략은 늘 바뀌었으며, 회의는 종종 의미보다 의전이 우선시됐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어떻게든 버텼고, 언젠가부터 저도 그 흐름을 꽤 능숙하게 따라갔습니다.
3막은 이직이었습니다. 3년 전 40을 바라보며 대기업을 나와 중소기업으로 옮겼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해했습니다.
“왜 나가?”
“지금 나이에?”
“그 좋은 회사를 왜?”
저는 그 선택이 실패가 아니라 시도였다고 믿습니다. 그 시도를 통해 처음으로 내가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4막은 단순한 이직이 아니라, 커리어의 전환점이 될 것 같습니다. '다음 직장'을 찾는 대신, '다음 나'를 만들어가는 시간입니다. 조금씩 더 나다운 방식으로 일하고, 말하고, 선택하는 쪽으로 천천히 방향을 틀고 있습니다. 요즘은 자연스럽게 주도적으로 해볼 수 있는 일, 작더라도 중국과 연계된 의미 있는 프로젝트, 말 대신 글로 정리해 보는 습관, AI 시대에 맞는 공부와 실험 이런 것들에 마음이 쏠립니다.
예전엔 "이걸 하면 어떤 보상이 따를까?"를 먼저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건 나한테 의미가 있나?"를 먼저 묻습니다. 그렇다고 크게 이룬 것도 아니고 확실한 길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방향을 조금씩 잡아간다’는 감각, 그 자체가 요즘의 저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예전엔 늘 선택 앞에서 망설였습니다.
“남들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더 좋은 조건은 없을까?”
“다른 선택을 하면 더 나았을까?”
그 질문들은 대부분 ‘외부의 시선’과 ‘보상의 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좀 다릅니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싶은가?”
“누구와 일하면 스트레스가 덜할까?”
“이 일은 내 성격과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는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질문이 바뀌었다는 건, 제가 조금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확신은 여전히 없지만, 이 질문들이 삶의 방향을 잡는 나침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커리어 4막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무대도 없고, 대본도 없고, 관객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이전까지는 누군가 정해준 무대 위에서, 주어진 대사를 익히며 타이밍을 맞춰 연기하듯 살아왔습니다.
지금은 무대는 없지만, 내가 고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습니다. 대본은 없지만, 내가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조금씩 키워가고 있습니다. 관객은 없지만, 나 자신이 충분한 관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후배가 묻습니다.
“요즘 선배는 뭐 준비하세요?”
저는 담담하게 대답합니다.
“내가 뭘 준비하는지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적어도, 남이 정해주는 커리어는 이제 끝났어.”
철없던 꼰대도 직장생활 15년만에 철이드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