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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그다드Cafe Jul 23. 2024

해킹당한 후배 M

결핍의 경제학

얼마  대학교 후배 M을 만났다. M은 현재 제조업 기반의 중소기업을 다니며, 영어를 잘해서 주로 해외쪽 일을 담당하고 있다. 회사에 필요한 원자재 및 아이템을 해외에서 수입하고, 더불어 해외영업 일도 맡고 있다. 중소기업이고, 또 후배 M이 워낙 일을 잘해서 업무의 범위가 넓다고 생각된다. 6년차급 대리.


M과 나의 대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M: 형. 나 회사에서 사고 쳤어...


나: 왜왜. 무슨 사고?


M: 내가 해킹을 당해서 잘못된 계좌로 회사 돈 천만 원 송금됐어...


나: 해킹???


M은 거의 울먹일듯이 해킹 당한 과정을 설명했다.


- M이 해외 거래선으로부터 원자재 구매 업무가 주어짐.


- M은 평소와 같이 해외 거래선과 이메일로 연락한 후, 가격과 조건을 협의하여 최종 인보이스를 요청함. (이미 해커는 M과 해외 거래선의 이메일 대화 내용을 해킹하여 모니터링하고 있었음)


- 인보이스 요청하는 메일을 기점으로, 해커는 교묘하게 이메일 주소의 도메인을 변경해서 M과 해외 거래선에게 각각 메일을 보냄. 예를 들어, @oppa.com이 원래 도메인이라고 하면, @cppa.com으로 도메인을 새로 만들어 각각 당사자에게 보낸 후, 서로의 이메일로 다시 보내 교란시킴.


- 결국, M과 M의 회사는 해커의 계좌로 천 만원을 송금함.


- M의 회사는 관할 경찰서로 피해 접수함.


- 하지만 경찰서에서는 피해 금액이 적고, 해외 송금 실수이기 때문에 수사에 한계가 있다고 답변함.


- 결국 M은 징계를 받았고, 3개월 동안 총 100만 원의 감봉조치가 있었다고 함. 900만 원은 회사가 부담함.


나는 M의 사연을 듣고 많이 안타까웠다. 평소 M은 회사에서 분야가 다른 여러 업무를 강도 높게 담당하고 있었다. M이 워낙 일을 잘해서, 일이 몰렸다. 결국 분야가 다른 여러 업무를 여유도 없는 상태에서 강도 높게 처리하는 M에게 사고가 터진 것이다. 


예전에 내가 미얀마 시멘트 공장에서 구매를 담당했는데, 그 때는 중국으로부터 많은 아이템을 수입했었다. 근무 후, 약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나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해커가 교묘한 인보이스를 보내온 것. 하지만 나는 그 때,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 이메일 주소와 내용, 인보이스 계좌 등을 다시 확인해 해커임을 밝혀냈다. 특히, 중국 업체가 영국 계좌 번호를 인보이스에 적은 것을 보고 완벽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 때 나와 지금 M의 차이는 딱 한 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여유의 차이. 회사일에서 여유가 있을 수 있냐고 누구는 반문할지는 모른다. 내 의견은 '느슨하지는 않지만 여유는 있을 수 있다' 이다. 조직에서 월급을 많이 받는 그 조직의 임원이나 장이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 만약 어느 정도 여유도 가질 수 없고, 계속해서 고강도로 압박만 한다면 그 조직은 오래 갈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압박만 받는다면, 언제가는 문제가 생기고 곧 그 사람이 속한 조직도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즉 사람이 끝도 없이 갈려 나갈 것이다. 그러면 조직은 존속할 수 없다.


생각해보면, 나는 미얀마에서 힘든 점도 많았지만 분명 업무적으로 시간적으로 여유는 있었다. 시멘트 공장에서 M과는 다르게 딱 구매 업무만 담당했고, 공장에서 먹고 자며 했기 때문에, 업무 외에는 시간도 꽤 많아 책도 많이 읽고 운동도 오래 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나는 여유라고 생각한다.


즉, 생각과 마음에 여유가 위험을 감지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그렇게 존재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데는 한 권의 책 영향이 컸다. 바로 센딜 멀레이너선Sendhil Mulllainathan, 엘다 샤퍼Eldar Shafir 공동 저자의 <결핍의 경제학>이라는 책이다.


<결핍의 경제학>에서는 여유가 없는, 즉 결핍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왜 실수를 연발하는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설명한다. 다음은 책에서 관련된 주요 내용을 발췌해서 요약했다.


1. 인지적 터널링(Cognitive Tunneling): 결핍 상태에서는 사람들의 주의가 결핍된 자원(예: 돈, 시간 등)에 집중되기 때문에 다른 중요한 요소들을 간과하게 된다. 한 가지 문제에 몰두하면서 다른 중요한 정보나 문제를 놓치게 된다. 이로 인해 실수가 잦아지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기 어려워진다.


2. 인지적 부채(Cognitive Load): 결핍 상태에서는 스트레스와 걱정이 늘어나면서 인지적 부채가 증가한다. 이는 두뇌가 여러 가지 문제를 동시에 처리해야 하므로, 주의력과 판단력이 저하되어 실수를 범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결핍으로 인한 지속적인 스트레스는 결국 인지적 자원을 고갈시키고, 이는 일상적인 업무 수행에도 영향을 미친다.


3. 결핍의 순환(Cycle of Scarcity): 결핍 상태에서는 단기적인 문제 해결에 급급하게 되어 장기적인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예컨대, 금전적 결핍으로 인해 당장 급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비싼 대출을 받게 되면, 이는 다시 재정적인 부담을 가중시켜 결핍 상태를 악화시킨다. 이러한 악순환은 지속적인 결핍 상태를 유지하게 하며, 실수를 반복하게 만든다.


4. 심리적 락인(Psychological Lock-in): 결핍 상태에서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창의적이고 장기적인 해결책을 생각하기보다는,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이는 제한된 인지 자원으로 인해 발생하며, 실수를 줄이기 위한 여유를 갖기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며, 이는 결핍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나는 M에게 <결핍의 경제학> 얘기를 들려줬다. 그리고 M에게 여유를 가지라고, 여유가 있어야 더 큰 실수를 막을 수 있다고 다독였다. M은 그러겠노라 내 앞에서 다짐을 했고, 나는 그런 M의 어깨를 최대한 여유있게 토닥여 주었다. M아, 힘내렴. 100만 원치 술은 내가 언제든지 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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