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우리 집 감나무는 주렁주렁 열린 감을 익히기도 전에 모조리 땅으로 떨궈버렸다. 동네 어르신들에게 여쭤보니 ‘해거리’하는 것이니 거름을 듬뿍 주어 방지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처방대로 감나무 주변에 거름을 넉넉히 뿌려주었다. 그 덕분인지 올해는 감들이 유독 탐스럽게 열렸고, 병들어 떨어지는 일 없이 무사히 잘 익어갔다.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다는 마음에 농사꾼처럼 뿌듯한 기분이 밀려왔다.
하지만 집집마다 감이 풍년인데도 동네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이들이 없는 시골에서 홍시를 소비해 줄 사람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귀한 간식이라며 도시의 손주들에게 가져다주었겠지만, 요즘 아이들은 자주 맛보지 못한 홍시보다는 아이스크림이나 다른 서구식 간식에 더 익숙하다. 나 역시 우리 손주들에게 여러 번 홍시를 발라 권해봤지만, 그들에게는 매력이 없는 모양이다. 나에게는 이보다 더 달고 맛있는 겨울 간식이 없는데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밭 가에 심어진 감나무마다 주렁주렁 매달렸던 누런 감들은 세월을 따라 붉게 변하더니 결국 물렁물렁한 홍시가 되어 그냥 땅으로 흘러내린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나는 떨어지기 전에 부지런히 이들을 수거해온다. 이렇게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귀한 겨울 식재료는 내게 소중한 간식거리가 된다. ‘세상에 이런 맛도 있는가’ 싶을 정도의 달콤함은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선사한다.
그러나 달콤한 홍시를 마음껏 즐기기에는 나에게 몇 가지 제약이 있다. 나는 당뇨 환자이기에 한꺼번에 많은 양을 먹을 수 없다. 아내는 홍시를 먹으면 변비가 심해진다며 잘 먹지 않으니, 수거해 온 홍시는 결국 모두 내 차지가 된다. 문제는 감이 홍시로 변하는 속도다. 하루 이틀에 걸쳐 조금씩 익어간다면 내 소비 속도에 맞추어 먹을 수 있겠지만, 한꺼번에 물렁물렁한 홍시로 변해가니 이들을 처리하기가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다. 처치 곤란의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 노년 세대는 무엇이든 아끼고 소중하게 다루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 먹을 것을 함부로 버리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홍시도 마찬가지다. 버릴 수 없으니 매일 아침 먹는 양을 조금 늘려 먹어보기로 한다. 당뇨 환자로서 걱정이 앞섰지만, 귀한 홍시를 버리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매일 아침 조금씩 홍시를 먹으면서도, 건강관리에 지장을 초래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실내자전거 타는 시간을 10분 더 늘리는 노력도 잊지 않았다.
걱정을 한가득 안고 2개월 만의 정기 검진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 당뇨 수치를 점검하고 약 처방을 받아야 하는 날이다. 간호사가 채취한 피로 잰 수치가 주치의에게 제시되는 순간, 나는 잔뜩 긴장했다. 홍시를 많이 먹은 탓에 당 수치가 좋지 않게 나올까 봐 염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로 좋았다. 매일 아침 홍시를 먹고 늘린 운동량 덕분이었을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안심이 되었다.
주치의에게 지난 한 달 동안의 홍시 섭취와 운동량 증가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의사는 홍시는 좋은 식재료이니 매일 먹어도 괜찮다고 하면서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한 번에 먹는 양이 지나치게 많아서는 안 된다는 것, 밤에는 먹지 말 것 등이었다. 그리고는 홍시를 오랫동안 신선하게 보관하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홍시의 껍질을 잘 발라낸 알맹이를 소량씩 비닐봉지에 담아 냉동고에 보관해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한 봉지씩 꺼내 녹여서 먹으면 된다는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주치의의 조언을 바로 실행에 옮겼다. 바구니에서 익어가는 모든 홍시를 껍질을 제거하고 알맹이만 작은 비닐봉지에 나누어 담아 냉동고에 넣었다. 다행히 우리 집에는 냉장고 외에 따로 냉동고가 설치되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로써 모든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 이상 너무 많은 홍시를 버리지 않고 먹어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냉동고 가득 쌓인 '홍시 봉지'들을 보니 날아갈 것 같은 해방감을 맛보았다. 이 기분은 정말 홍시처럼 달콤하고 상쾌하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생기는 대부분의 문제는 이렇게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반드시 길은 열려있다는 것을 새삼 느껴보는 하루다. 넘쳐나는 홍시를 처리해야 했던 작은 문제부터 건강 관리의 딜레마까지, 모든 실타래가 의사의 조언과 나의 실행으로 깨끗하게 풀렸다. 이제 나는 겨울 내내 달콤한 홍시 아이스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