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마음이 먼저더라”

사라지는 공동체, 김치 한 양푼의 미덕

by 정용우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시내 한번 나가려면 큰마음 먹어야 하는 시골이다. 모처럼 시내에 나갈 때면 마치 보따리장수처럼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한다. 어제도 그랬다. 지병인 당뇨병 정기 검진을 마치고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 들렀다. 이 중요한 일과를 끝낸 후에는 나만의 소소한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병원 근처 단골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을 비우는 것이다. 주치의는 가급적 피하라고 권하지만, 내 최애 음식인 이 집 짜장면은 양이 적절하고 가격 대비 만족도까지 높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나만의 작은 사치다.


식사를 마치고는 오랜 단골 미장원에 들렀다. 머리 커트를 부탁하고 평소처럼 사장 아줌마와 정다운 대화를 나누었다. 가게에 들어서니 김장 준비를 하던 중이었던 모양이다. 자연스레 화제는 김장으로 흘러갔다. 아줌마는 "옛날에는 김장철이 오면 온 동네가 잔치였는데"라며 옛 추억을 회상했다. 나 역시 어릴 적 우리 집에서 배추 100포기 이상을 담가 이웃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러나 대화는 이내 씁쓸한 현실로 이어졌다. 사장 아줌마는 "요즘은 그런 분위기가 많이 사라졌어요. 물가가 너무 올라서 김장 재료값이 장난이 아니니, 남에게 나눠주는 게 부담스러워졌지요."라고 털어놓았다. 각박해진 세상의 인심이 김장 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말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랬던 오늘, 옆 동네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친구가 커다란 양푼에 김장김치를 가득 담아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 6년 전 경찰에서 은퇴하고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부부다. 그들이 직접 농사지은 배추로 정성껏 담근 김장김치였다. 뜻밖의 큰 선물에 고마운 마음에 어제 미장원 사장 아줌마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친구에게 전했다. 그러자 친구는 껄껄 웃으며 "그게 사실이긴 하지"라고 수긍하면서도, "그래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먼저더라"고 덧붙였다. 고마움과 함께 뭉클한 감동이 밀려왔다. 친구 부부의 김장김치는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라져가는 농촌 공동체의 미덕이자, 이웃 간의 따뜻한 정이 김치에 깃들어 온 것이었다.


예전 농촌은 수확물을 저 혼자 먹기 위해 농사짓지 않고 나누어 먹기 위해 농사짓는다는 말이 있었다. 농부가 땀 흘려 가꾼 생명이 이웃에게 흘러가는 미담은 농촌 공동체의 기본 정신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정겨운 풍습이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마을 공동체가 물질 만능주의와 개인주의 앞에서 점차 무너지고 있다는 뼈아픈 증거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힘이 많이 드는 ‘사랑의 작업’이다. 예전 농부들은 돈도 중요했지만, 땅에서 생명을 기르고 이웃과 나누는 일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농촌마저 돈이 되는 일이 아니면 외면하고, 고된 노동은 사양하는 세태가 만연하고 있다. 농자재 가격은 치솟고, 인건비는 감당하기 어려워 대농이 아니면 수지를 맞추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농촌이 돈 중심으로 돌아가니 세상 인심이 각박해지고 있다.


더욱이 인구 감소로 인한 마을 공동체의 소멸 위기가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공동체 자체가 활력을 잃으니, 사는 것 자체가 시큰둥해진다. 내 개인의 생존 문제 외에는 관심 밖의 일이 되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여유는 사치가 되었다. 너그러운 인심이 살아 숨 쉬던 시골 공동체는 이제 옛이야기가 되어버린 듯하다.


오규원 시인은 그의 시 ‘사람과 집’에서 이웃들의 집을 하나하나 호명한다. '김종택의 집을 지나 이순식의 집과 정진수의 집을 지나 박일의 집 담을 지나 이말청의 집 담장과 심호대의 집 담장을 지나 박무남의 집 담벽과 송수걸의 집 담벽과 이한의 집 담벽을 지나 강수철의 집 벽과 천길순의 집 벽을 지나(후략).' 시인은 이 호명을 통해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살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일 테다. 담장과 담벽을 맞대고 서로의 삶에 기대어 사는 공동체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정부에서는 여러 가지 정책을 펴서 시골 공동체에 활기를 불어넣으려 하지만, 그 결실을 언제쯤 볼 수 있을지, 혹은 보기나 할 수 있을지 우려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지만 오늘 동창 친구가 가져온 김장김치 한 양푼은, 사라져가는 줄 알았던 농촌의 훈훈한 인심과 공동체의 미덕이 아직은 우리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작지만 값진 이 나눔이 팍팍한 시골 생활에 따뜻한 위로와 희망의 씨앗이 되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 작은 씨앗이 널리 퍼져서, 온 마을이 다시금 나눔의 정으로 활기를 되찾는 날을 간절히 기대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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