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때로 기록보다 선명하게 남는 법이다. 원·달러 환율이 1,440원을 돌파하며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수치를 기록했던 지난 2022년 가을,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던진 일성은 매우 준엄했다. 그는 당시 "환율 폭등으로 이 나라 모든 국민의 재산이 날아가고 있다"며, 경제 실정으로 인해 나라가 후진국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절박한 경고를 던졌다. 그 호소는 집권 세력을 향한 날카로운 화살이자 국민의 불안을 대변하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환율이 1,500원 선을 위협하는 지금, 그때의 준엄했던 비판과 책임의 목소리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환율은 단순한 지표가 아니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서 환율 상승은 곧장 서민의 밥상물가를 정조준한다. 환율이 오를 때마다 국민의 실질 자산 가치는 하락하고 구매력은 바닥을 친다. 나라가 망할 뻔했다던 그 위기감은 지금 정부와 집권 여당의 언행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수입 물가 폭등의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의 몫으로 돌아오고 있다. 나 역시 매일 아침 환율 숫자를 들여다보며 커져가는 불안감을 억누를 길이 없다.
이러한 고물가의 역습은 우리 주변의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서민과 학생들이 즐겨 찾던 편의점의 풍경이 이를 증명한다. 새해 벽두부터 편의점 자체브랜드(PB) 제품 가격이 최대 25%까지 인상된다는 소식은 참으로 암울하다. 가성비의 최후 보루마저 무너진 셈이다.
난청을 앓고 있는 나에게 손주들과 함께하는 편의점 나들이는 단순한 소비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가는 귀가 먹어 아이들의 빠른 말소리를 온전히 알아듣기 힘든 내 처지에서, 화려한 진열대 앞에 서서 아이들과 눈빛을 교환해가며 맛있는 과자를 함께 고르는 재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아이들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며 마음을 전하던 그 소소한 소통의 시간은 내가 할아버지로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다. 하지만 이제 계산대 앞에서 마주하는 숫자는 그 따스한 풍경마저 앗아가려 한다. 아이들에게 선뜻 "더 골라봐라"라고 말하지 못하고, 훌쩍 뛰어오른 가격표를 보며 속으로 셈을 해야 하는 이 씁쓸한 현실이 바로 고물가의 민낯이다.
상황이 이토록 엄중함에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도저히 위기 상황이라고 믿기 어려운 행보를 보인다. 고환율과 고물가를 해결하려면 유동성을 관리하고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권은 마치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거대한 유전이나 금맥이라도 터진 것처럼 선심성 정책을 쏟아낸다. 각종 수당과 지원금이라는 이름으로 풀리는 돈은 당장 달콤할지 모르나, 경제학의 원리는 냉혹하다. 통화량이 늘어나면 화폐 가치는 하락하고 물가는 반드시 오른다.
한 손으로는 물가를 잡겠다고 공언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시장에 돈을 무차별적으로 살포하는 ‘묻지마 확장재정’은 명백한 자가당착이다. 고물가 시기에는 재정 긴축을 통해 시중 통화량을 조절하는 것이 정석임에도, 현 정부는 오히려 현금성 지원책으로 화폐 가치 하락을 자초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대책이 아니라, 정책 간 충돌로 인해 물가 상승의 기간을 더 길게 늘어뜨리는 무책임한 처사다. 이러한 막무가내식 돈 풀기는 결국 인플레이션이라는 거센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정책의 목적이 국민의 실질적인 삶을 개선하는 데 있는지, 아니면 눈앞의 표심을 사기 위한 매표 행위에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반복되는 교훈을 준다. 빌 클린턴을 당선시켰던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슬로건이나, 1956년 대선 당시의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는 경제적 고통이 민심을 어떻게 폭발시키는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민심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화가 나면 언제든 그 배를 뒤집는다. 국민의 인내는 무한하지 않으며, 경제적 실책 앞에서 민심은 한없이 냉정해진다.
지금이라도 정부와 여당은 확장재정의 유혹에서 단호히 벗어나야 한다. 국가의 곳간은 화수분이 아니며, 무분별하게 풀린 돈은 반드시 고물가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환율 급등을 방관하고 현금 살포에만 몰두한다면, 과거 본인들이 했던 비판은 고스란히 스스로를 겨냥하게 될 것이다.
과거 야당 시절에 외쳤던 그 절박한 경고가 진심이었다면, 집권 후에는 더 엄격한 잣대로 유동성을 조절하고 민생 경제의 체질 개선에 나서야 마땅하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공짜 돈 몇 푼이 아니라, 내가 번 돈의 가치가 지켜지는 안정적인 경제 체제다. 경제 앞에서 민심은 늘 정직하며, 그 민심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오직 진정성 있는 책임 정치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