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한 사람의 이름 앞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을 붙인다. 위대한 철학자, 위대한 예술가, 위대한 지도자. 그 수식은 대개 그가 남긴 찬란한 업적을 향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기록이 쌓일수록, 그 위대함의 짙은 이면이 함께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 순간 우리는 당혹감에 빠진다. “어떻게 이런 결함을 가진 사람이 존경의 대상일 수 있었을까.”
올해 아흔일곱의 노학자 노엄 촘스키는 오랫동안 미국 좌파 지식인의 양심으로 추앙받아 왔다. 그러나 말년에 그는 추악한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과의 부적절한 교류 사실이 드러나며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 관계의 실체가 무엇이었든, 도덕적 결벽을 강조하던 ‘시대의 양심’이 범죄자와 연루되었다는 사실은 대중에게 배신감을 넘어선 허탈함을 안겼다. 물론 촘스키만의 문제는 아니다. 엡스타인과 얽혔던 유명 인사들은 수없이 많다. 다만 도덕적 기대치가 가장 높았던 인물에게 가장 큰 실망이 돌아갔을 뿐이다.
문학과 예술의 거장들도 예외는 아니다. 헤밍웨이는 위대한 작가였지만 일상에서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삶을 반복했고, 피카소는 천재적인 화가였으나 곁의 여성들에게는 잔혹했다. 우리는 그들의 작품을 사랑하면서도, 그 삶의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주저한다. 예술은 예술이고 인간은 인간이라고 선을 그어 불편함을 피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고대의 성인들에게서도 반복된다. 서구 철학의 시조 소크라테스는 현대적 관점에서도 여전히 결백한 성자일까. 그는 진리를 탐구했으나 민주주의의 가치를 불신했고, 국가가 개인을 철저히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았다. 장애인을 배제해야 한다는 식의 사고는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참작하더라도 오늘날 기준에선 경악스럽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인류의 스승’으로 남아 있다.
동양의 성인 공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예술을 사랑한 인문주의자였지만, 자신이 선호하지 않는 음악을 ‘근본 없는 것’이라 배척했다. 심지어 연회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광대들의 처형을 명했다는 기록은 질서와 예를 중시한 그의 철학이 누군가에게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이었음을 시사한다. 공자의 위상은 높아졌을지 모르나,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에게 그는 결코 성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를 빛낸 영웅들에 이르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시대를 바꿨다는 찬사 뒤에는 언제나 수많은 희생자가 존재한다. 그들의 결단이 역사의 물줄기를 돌렸을지언정, 그 과정에서 자행된 폭력이 온전히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어쩌면 영웅이란 이름은 가장 거대한 권력을 가졌던 이에게 후대가 부여한 면죄부일지도 모른다.
이 논쟁은 먼 과거의 성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우리 사회의 유명 인사들이 보여주는 논란을 보더라도, 대중은 찬탄과 분노 사이를 급격히 오간다. 어제까지 존경받던 이가 하루아침에 배척되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을 평가할 때 ‘무결점’이라는 과도한 잣대를 들이대며 스스로 실망할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결함이 드러난 인물들을 더 이상 숭배하지 말고 혐오해야 할까. 아니면 불편함을 애써 외면한 채 업적만을 기념해야 할까. 어느 쪽도 쉬운 선택은 아니다.
여기서 떠오르는 말이 있다. 無求備於一人,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지 말라는 뜻이다. 주공(周公)이 아들 백금(伯禽)에게 남긴 이 말은, 인간을 바라보는 가장 현실적인 지혜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으며, 위대함과 추함은 종종 한 몸에 공존한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을 신격화하지 않는 태도다.
우리는 누군가의 사상과 업적에서 배울 점을 취할 수 있다. 동시에 그 사람의 한계와 오류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존경은 맹목이 아니라 비판 위에서 가능해야 한다. 그래야만 타인의 결함에 분노하면서도, 스스로의 결함에는 관대해지는 위선을 피할 수 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모순적인 존재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 자신 역시 누군가의 눈에는 그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이 서글프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완벽을 요구하지 않는 태도가 절실하다. 완벽한 인간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불완전한 타인 속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경계할지를 선택하는 일. 그것이 이 불완전한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우리가 붙들어야 할 현실적인 삶의 지표일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