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 사는 딸에게서 급한 소환 요청이 왔다. 급작스러운 사정으로 아이를 돌볼 사람이 필요해진 것이다. 서울로 가서 오후 10시까지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단다. 일정을 연기할 수 없는 처지일 뿐더러 남편도 출장 스케줄이 잡혀 있다고 하기에 결국 친정 엄마, 즉 아내가 대전으로 향했다. 손자가 열과 기침으로 유치원에 가지 못하게 된 상황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손자를 돌보는 기쁨도 잠시, 아픈 아이는 밥을 잘 먹지 않아 애를 태웠다.
할머니는 손자를 달래기 시작했다. "밥 잘 먹고 나면 할머니가 맛있는 거 사줄게." 이 약속 덕분인지, 아이는 먹기 싫은 밥을 조금이라도 더 먹는 시늉을 했다. 식사 후 약속대로 무엇이 먹고 싶으냐 물었더니, 아이의 대답은 명쾌했다. "아이스크림!“
할머니는 손자를 데리고 배스킨라빈스로 가려 현관문을 나섰다. 그 순간, 초등학교 4학년인 손녀가 전광석화처럼 따라나섰다. 할머니와 손자, 손녀 세 사람이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하던 중, 결정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손녀가 동생에게 은밀하게 귓속말을 하더니, 갑자기 방향을 튼 것이다. 그들의 목적지는 대형 아이스크림 할인판매장이었다. 할머니는 그저 순진한 듯 보이는 손자매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게에 들어선 손녀는 익숙한 단골손님처럼 신속하게 움직였다. 아이스크림 여러 개를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는데, 동생이 품질이 좋지 않아 보이는 것을 집으려 할 때마다 제지하며 '값비싼 것' 위주로만 골라 담는 고집을 부렸다. 할머니가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사면 냉동실에 다 못 넣어."라며 말렸지만, 손녀는 "잘 정리하면 다 들어갈 수 있어요!"라고 주장하며 기어코 박스를 가득 채우고 말았다.
모처럼 만에 만난 할머니는 그야말로 '봉'이었다. 아이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평소 엄마 몰래는 마음껏 사기 어려웠던, '엄청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무제한으로 확보할 수 있는 '호기(好機)'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음껏 누렸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는 웃겨서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평소 집에서는 티격태격하며 싸우기도 하는 남매가, 이 순간만큼은 어찌 그리 호흡이 척척 맞는지! 서로 상의해 가며 아이스크림을 바구니에 담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기회가 왔음을 감지하고, 그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일시적인 연합 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이스크림으로 가득 채운 박스, 그 자체가 작은 승리였을 것이다.
이 유쾌한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손녀에게는 '할머니가 오셨고, 동생이 아파서 아이스크림 약속을 했으며, 엄마 아빠는 안 계신 이 시점'이 아이스크림 대량 구매를 위한 완벽한 호기였다. 아이는 이 일련의 상황을 놓치지 않았고, 주도적으로 베스킨라빈스가 아닌 할인판매장으로 경로를 수정하여 이익을 극대화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의 삶에도 살다 보면 가끔은 이런 '호기'가 찾아온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처럼 그 기회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놓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일까? 바로 주의 깊은 관심과 촉각을 곤두세우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특히 노년 세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주변을 향한 관심의 폭과 깊이가 좁아지기 쉽다. 일상이 습관처럼 반복되고, 새로운 변화를 감지하려는 의지가 무뎌진다. 그러다가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아, 그때 그 사건이, 그 만남이, 그 제안이 바로 호기였구나.'하고 깨닫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이미 흘러가 버린 기회는 후회만을 남길 뿐이다.
물론,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이런 '호기'를 굳이 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기회가 저절로 자주 열릴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노력하는 이들에게 공평한 보상이 주어지고, 우리는 정녕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사회의 현실은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보장해 주기에는 아직 요원하다. 따라서 우리는 손녀처럼, 일상을 살면서도 이 호기를 놓치지 않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이제 노년 세대에 접어든 우리도 손녀처럼 주변을 끊임없이 살피고, 우리 앞에 우연히 열린 문을 놓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재치 있게 노년의 활력소가 될 ‘작은 호기’를 붙잡고 마음껏 누린다면, 우리의 남은 삶은 후회 대신 웃음으로 가득 찰 것이다. 아이스크림 박스를 가득 채운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처럼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