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에서 피어나는 황금빛 약속

낮달맞이꽃의 지혜

by 정용우

매서운 북풍이 몰아치는 겨울, 우리 집 화단과 텃밭은 시간이 멈춘 듯 황량한 적막에 휩싸입니다. 한동안 무성했던 잎들은 생존이라는 엄숙한 명령 앞에 스스로를 내려놓고 차가운 대지 위로 흩어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무들은 물기를 거두어 몸을 비우고, 시린 하늘 아래 앙상한 뼈대만을 드러낸 채 긴 고립의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생명의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이 삭막한 계절, 회색빛 풍경 속에서도 동백나무의 짙푸름과 만리향의 단단한 잎들은 여전히 생의 의지를 증명하며 의연하게 서 있습니다.


계절의 갈무리가 한창인 이때에도 화단을 둘러보는 오랜 습관을 어쩌지 못해 거실 창밖으로 자주 눈길을 던지곤 합니다. 그때마다 유독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는 존재가 있으니, 마당 네 곳에 자리 잡은 ‘낮달맞이꽃’ 화단입니다. 꽁꽁 얼어붙은 흙바닥 위에서도 보석처럼 박혀 있는 이들의 짙은 자녹색(紫綠色) 빛은 거실 안까지 선명한 생동감을 전해줍니다. 추위를 견디느라 잎가마다 보랏빛 멍처럼 배어든 그 단단한 색감은, 삭막한 무채색의 겨울 풍경을 가르는 한 줄기 희망과도 같습니다. 이는 단순히 살아남았다는 표식이 아니라, 가장 치열하게 겨울을 살아내고 있다는 훈장처럼 보입니다.


이 풀들이 보여주는 독특한 생존 현상을 우리는 '로제트(Rosette) 현상'이라고 합니다. 방사형으로 잎을 넓게 펼친 모양이 마치 한 송이 장미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 집에는 낮달맞이꽃 화단이 네 군데나 조성되어 있는데, 겨울철에도 이 로제트 현상 덕분에 메마른 땅 위에서 이토록 귀한 자녹색의 생명력을 볼 수 있으니 저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식물입니다. 이들은 땅바닥에 몸을 바짝 붙여 살을 에는 찬 바람을 피하고, 대지가 머금은 미세한 온기를 품으며 겨울을 납니다.


이 로제트 현상은 식물이 차가운 계절을 관통해 살아가는 치열한 존재 방식입니다. 남들이 모두 잎을 버리고 몸을 사릴 때, 낮달맞이꽃은 오히려 가장 낮은 곳에서 푸른 빛을 유지하며 버텨냅니다. 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생명이 가진 다양성과 그 경이로운 적응력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곤 합니다.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세로 태양 빛을 최대한 흡수하며 다음 계절의 폭발적인 성장을 준비하는 그 영리함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특히 우리 집의 네 화단에서 이들이 때를 만나 꽃을 피워내면, 우리 집 화단은 그 화려함이 극에 달합니다. 겨울 내내 땅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힘을 응축하던 로제트들이 봄의 기운을 받으면 마법처럼 줄기를 쑥쑥 뽑아 올립니다. 밤에 피는 일반 달맞이꽃과는 달리, 우리 집 낮달맞이꽃은 해가 뜨는 시각부터 바로 노란색 환상이 펼쳐집니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꽃잎들이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일제히 기지개를 켜면, 네 곳의 화단은 순식간에 눈부신 황금빛 바다로 변합니다. 온 마당을 가득 채운 그 찬란한 노란 물결은 보는 이의 마음마저 환하게 밝혀주며,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생명력을 선사합니다.


이러한 식물의 생존 방식은 우리네 이웃들의 삶과도 닮아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 춥고 황량한 겨울을 로제트 식물처럼 보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대개 삶의 무게가 무거운 가난한 이들입니다. 그들에게 겨울은 다른 이들보다 더 길고, 더 춥게 느껴질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차가운 현실의 바닥에 몸을 낮추고 살아가지만, 그들의 가슴 속에도 뜨거운 사랑이 있고 원대한 꿈이 숨 쉬고 있습니다. 남루한 외투 아래 가려져 있을 뿐, 그들도 인간답게 살고 싶은 간절한 소망과 아름다운 삶을 향한 숭고한 열망을 한시도 놓지 않고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침묵은 포기가 아니라 응축이며, 그들의 낮음은 굴복이 아니라 비상을 위한 준비입니다. 지금 땅바닥에 붙어 있다고 해서 그들의 가치가 낮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온몸으로 빛을 모으고 있는 고귀한 인고의 시간입니다. 고통스러운 추위 속에서도 끝내 잃지 않는 그들의 존엄과 열망은, 훗날 찾아올 봄날에 누구보다 높고 화려한 꽃대를 세우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


이 추운 겨울, 대지에 몸을 밀착하고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모든 이들의 삶을 응원합니다. 시린 바람 속에서도 자녹색 잎을 놓지 않는 낮달맞이꽃의 인내가 결국 마당 가득 찬란한 황금빛 꽃밭을 일궈내듯, 우리네 삶의 겨울도 훗날 가장 화려하고 당당한 아침으로 피어나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낮은 곳에서 피어나는 그들의 지혜와 끈기가 마침내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출 그날을 간절히 기다려 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