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선약수, 그 이름처럼

by 정용우

추석 연휴를 맞아 외손녀 재은이가 우리 집을 다녀갔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재은이는 이젠 제법 야무진 꼬마 숙녀다. 어릴 적에는 이곳에 와도 방 안에만 머물기 일쑤였지만, 이제는 곧잘 밖으로 나선다. 어떤 때에는 황매산 정상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예전에는 산중턱도 힘들어하던 아이가, 이제는 황매산 정상까지 오르기도 한다. 참 많이 컸다는 뜻이다.


이렇게 자란 아이에게 이제 강둑길 산책쯤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그래서 하루는 저녁 무렵, 손을 잡고 천천히 강둑길을 걸었다. 산 아래 강은 말없이 흘러가고 있었고, 가을 초입의 저녁바람은 서늘하되 상쾌했다. 나는 재은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이름부터가 ‘흐르는 강물’이야.”


재은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부터 가족들이 부르던 별칭처럼 들었겠지만 정작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을 테니까. 나는 이름 이야기를 꺼냈다. “너는 이름 두 글자 '재은'부터가 '흐르는 강물'이야. '재(渽)'는 강 이름, '은(溵)'은 물 이름을 뜻한단다.” 흔히 쓰이지 않는 글자라 이름만 보고는 뜻을 알기가 쉽지 않다. 이 이름은 아빠가 지어주었다.


아버지는 자연생태학자이기도 하고 산림청 공무원이기도 하다. 전공분야와 직업이 이렇다 보니 전국을 돌아다닌다. 그러기에 딸의 이름에도 그 마음을 담았으리라. ‘강이름’과 ‘물이름’을 붙여 한 사람의 이름을 짓다니.., 나는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이 이름이 참 좋았다. 이름이 왠지 물처럼 느껴졌다. 유장하고, 깊고, 잔잔하면서도 멀리 흘러갈 것만 같은. 이러한 이름의 의미 때문에, 우리는 재은이가 어릴 적엔 별명으로 ‘흐르는 강물’이라 부르기도 했다.


산책길에서 나는 강물 이야기를 더 풀어놓았다. 아직 초등학교 4학년생인 손녀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재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잘 듣는다. 워낙 책을 많이 읽는 아이여서 그런지 어른들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곱씹는 버릇이 있다.


“노자도 물을 참 좋아하셨단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지.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야.”


나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설명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되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꺼려하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고. 그래서 물이야말로 도(道)에 가까운 존재라고 하셨단다.


재은이는 말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중얼이듯 말했다.

“정말 물이 다정한 친구 같네.”


나는 잠시 말이 막혔다. 맞다. 물은 다정한 친구다. 다투지 않고, 누군가를 앞서려 하지 않으며, 낮은 곳을 마다하지 않는다. 어떤 장애물이 와도 돌아가고, 때로는 갈라지고, 웅덩이를 만나면 그 자리에 머물 줄도 안다. 조급하지 않되 포기하지 않는 존재. 바로 그게 강물이다.


공자도 물을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수재수재(水哉水哉)” 하며 감탄하곤 했다고 한다. 제자 자공이 그 이유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두루 베풀고(德), 생명을 주며(仁), 이치에 따라 흐르고(義), 낭떠러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勇)”고.


이 네 가지 덕목을 한 아이가 품고 산다면 어떨까. 세상의 어떤 스승도, 부모도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나는 강물처럼 살아가라는 말의 의미를 재은이가 천천히, 자연스럽게 깨달아가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말로 가르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흐를 뿐이다. 아이가 흘러가는 물을 자주 보고, 물을 닮은 사람들을 만나고, 자기 안에서 천천히 그 의미를 길어 올릴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 그것이 어른의 자리 아닐까.


재은이는 이젠 돌아가고 없다. 대전으로 가기 전날 밤, 나는 평소처럼 저녁 산책을 나섰다. 늘 그렇듯 강둑길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도 강물은 묵묵히 제 길을 가고 있었다. 그 곁에 서서 나는 다시 한 번 기도했다.


흐르고 흘러, 결국 큰 지혜의 바다에 이르기를. 고요하고 여유롭게, 때로는 잠시 머물고 돌아가면서도 끝내는 나아가는 삶이기를. 그러면서도 언제나 생명을 보듬는 넉넉한 존재이기를. 그리고 그 삶의 끝에서 '달빛 같은 자유‘를 누리기를.


물처럼 낮은 곳에 머물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고, 달빛처럼 조용히 세상을 비추는 삶. 나는 재은이가 언젠가 그런 삶을 살아주기를 바란다. 세상의 빛나는 강물이 되고, 그 위로 조용한 달빛 하나 떠 있는 것처럼, 자유롭고 단정한 삶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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