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이삭을 갖고 간 외손자를 생각하며

by 정용우

추석 연휴가 되면 멀리 있는 가족들이 하나둘 고향을 찾는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전에 사는 외손자가 가족과 함께 이곳 지수를 다녀갔다. 나이 다섯 살. 유치원에 다닌다. 어릴 적에는 낯선 사람 앞에 나서지도 못하더니, 요즘은 밖으로 나가고 싶어 안달이다. 얼마나 활발하고 호기심이 많은지, 엄마가 따라다니기가 힘들 정도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들판으로 나가자고 졸라댔다. 메뚜기를 잡고 싶단다.

“하삐(우리 집에서는 할아버지를 이렇게 부른다)! 나 곤충박사 될 거야!”

“왜?”

“아빠는 새 박사니까 나는 곤충 박사 할래.”

아빠는 자연생태학자이자 공무원이다. 직업은 공무원이지만, 새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지식으로 우리 가족에게는 오래전부터 ‘새 박사’로 통한다. 그러니 아들의 꿈도 자연스럽게 곤충 쪽으로 흘러간 것일 테다.


엄마가 아이 손을 잡고 들판으로 향했다. 그런데 돌아온 두 사람의 표정이 조금은 의외였다. 아이는 조금 실망한 얼굴이었고, 엄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삐, 논에 메뚜기가 없어요. 그래서 메뚜기 대신 벼이삭 몇 개를 꺾어왔어요.”

곤충채집통 안에는 메뚜기 대신 벼이삭 몇 포기만 들어 있었다.


그 순간, 내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가을 논에는 메뚜기가 지천이었다. 한 발짝 옮기면 푸드득 날아가고, 또 한 발짝 옮기면 몇 마리가 더 튀었다. 손만 뻗으면 잡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농약과 제초제, 기계화된 농사, 생태계 변화로 인해 논에서는 메뚜기를 찾기 어렵다. 들판은 여전히 평화롭게 보이지만, 그 안의 생명은 조용히 자취를 감춰가고 있는 셈이다.


외손자는 벼이삭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하삐, 이거 대전으로 가져가도 돼요? 곤충은 없지만, 이것도 소중하니까요.”

아이의 말이 반갑고도 놀라웠다. 벼이삭의 ‘소중함’을 벌써 감지하다니.

나는 아이와 대화를 이어갔다.

“재아야, 벼이삭이 익으면 뭐가 되지?”

“쌀이요.”

“그럼 쌀은 뭐 하는 데 쓰지?”

“밥이요.”

“밥은 왜 먹지?”

“살기 위해서요.”

“그럼 이거, 정말 소중한 거네?”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서 가져갈 거예요. 우리 집에 가서도 잘 간직할래요.”


나는 외손자와의 대화를 오래 기억하고 싶다. 어쩌면 그 순간은 아이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먹는 것’의 본질을 생각해본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메뚜기 찾기는 벼이삭을 매개로 생명의 가치에 대한 묵상으로 이어졌다.


생각은 자연스럽게 장일순 선생의 말로 이어졌다. 그는 ‘밥 한 공기에도 우주가 담겨 있다’고 했다. 한 톨의 나락이 자라기까지, 햇빛과 바람, 비, 땅, 사람의 손길 등 온 우주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락 한 알은 그 자체로 ‘우주’이며, 생명이다. 그는 또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는 표현도 남겼다.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 곧 생명이 다른 생명을 먹으며 살아간다는, 생명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다. 밥 한 숟가락, 나락 한 알에도 이런 우주의 순환과 생명의 위엄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외손자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요즘은 밥이 너무 흔해졌다. 쌀은 더 이상 귀한 음식이 아니라, 심지어 잉여가 되었다. 밥이 남는 시대, 음식이 버려지는 시대, 먹는 것을 ‘쇼’로 소비하는 시대. ‘먹방’과 ‘폭식’이 유행처럼 번지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벼이삭 몇 포기를 귀하게 여긴 외손자의 마음이 더없이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외손자는 대전으로 떠났다. 손에는 곤충채집통이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여전히 벼이삭이 들어 있었다. 아이는 그것을 꼭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 이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오늘의 그 기억이 마음속 어딘가에 은은히 머물러 있기를. 밥 한 그릇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벼이삭 하나에 얼마나 많은 생명과 우주의 손길이 담겨 있는지. 그리고 먹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경건하고 책임 있는 일인지. 이 모든 것을 아이 스스로 깨닫게 될 날이 오기를 바란다.


‘하삐’와 나눈 이 짧은 대화가, 그 아이의 삶에서 하나의 씨앗처럼 남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그 씨앗이 조용히 싹틀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참 고마울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