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맹자·순경 열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일찍이 <맹자>라는 책을 읽다가 양나라 혜왕이 맹자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책 읽기를 멈추고, ‘아! 이익이란 진실로 혼란의 시작이로구나.’라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태사공은 왜 이토록 깊은 탄식을 했던 것일까? 그가 보기에 '이익'은 사람과 사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그릇된 판단을 하게 만드는 혼란의 본질적 원인이었다. 공자가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한을 사는 일이 많다.”고 한 것도, 사람 사이의 신뢰와 공동체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 바로 그 ‘이익’이라는 판단 기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정치 현실은 고전의 가르침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정치가 국민을 위한 공적인 영역이라기보다, 철저히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전략의 장으로 전락한 듯한 인상을 준다. 정책의 방향보다 표 계산이 앞서고, 공동체의 장기적 안정보다는 당장의 여론과 지지율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어떤 정당이 정권을 잡든 관계없이 반복되어온 이러한 모습은, 정치 전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서서히 침식시켜 왔다. 부동산 정책이나 특정 지역 개발, 복지나 노동 개혁과 같은 중요한 의제들이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뒤바뀌는 일이 거듭되면서, 정치는 점점 공공의 언어에서 멀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선거철이 되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실현 가능성과는 거리가 먼 공약들이 난무하고, 말의 무게보다는 말의 효과만이 중시된다. 선거가 끝나면 이전의 약속은 조용히 잊히고, 다시금 정치적 타협과 후퇴가 반복된다. 그 과정에서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냉소가 자리 잡게 되고, 정치인에 대한 기대와 존중은 점점 사라진다. 이는 정치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반에 신뢰의 위기를 낳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징후가 된다.
이럴 때일수록 정치인들만을 탓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사회가 무너질 때 그 기반을 다시 일으키는 것은 결국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바른 삶과 마음가짐이다. 공자와 맹자가 수천 년 전 강조했던 '의로움(義)'은 단지 철학자의 이상이 아니라, 나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일상의 자세이다. 그렇기에 이런 ‘의’를 말하는 담론은 단체 채팅방에서 자주 회자되는 주제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네 실제 삶에서는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상황 아래서는 속절없이 무너져버린다. 나 역시 그렇다. 뼛속까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 터이다. ‘의’를 말하면서도 내심은 내 손해가 될까 저울질하고, 남보다 뒤처질까 걱정하는 나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럴 때일수록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 역시 성찰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무심코 하는 말 속에서, 작은 선택의 순간마다 이익이 아니라 옳음을 따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줄을 설 때 새치기를 하지 않으며, 공공의 질서를 지키는 것. 이런 기본적인 태도가 모여 사회의 도덕적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정치인은 국민을 닮는다. 국민이 바른 기준을 세우고 살아갈 때, 정치는 그를 따라 바뀐다.
가정 안에서도, 직장 안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선택 앞에 선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는 마음, 경쟁에서 이기려는 조급함이 내 양심을 흔들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이것이 과연 옳은가?”를 스스로 묻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수양이며, 시대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다.
고대의 성인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묻고 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지금 우리의 정치가 혼란에 빠지고 도덕적 신뢰를 상실하고 있다면, 그 근본 원인은 어쩌면 우리 자신이 ‘이익 중심의 삶’을 당연시해 온 데 있을지도 모른다. 나부터 바뀌어야 한다. 말 한마디에 무게를 싣고, 작은 행동에 신의를 담아야 한다. 정치가 이익이 아닌 의로움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일상 속에서 먼저 그 길을 시작해야 한다. 이제는 물어야 할 때다. 나라를 이롭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익이 아니라 의로움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정치인에게만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기준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나의 일상에서 ‘의’를 따르는 실천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그것이 곧 우리 공동체가 다시 바로 서는 길임을 믿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