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

by 정용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명동성당 지하에 적혀 있는 이 문구는 짧지만 강한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흔히 걱정에 사로잡힙니다.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불안에 떨고, 손에 쥐고 있는 작은 행복마저 놓쳐버립니다. 기도는 그런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는 위안의 통로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자주 기도하면서도 여전히 걱정에 사로잡혀 살아갈까요?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현대 사회는 수많은 정보와 속보로 가득 차 있습니다. 뉴스의 헤드라인은 대개 사고, 범죄, 부정, 갈등 같은 부정적인 이야기들입니다. 긍정적이고 따뜻한 이야기는 뒤로 밀리기 일쑤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인간의 ‘부정 편향성(negativity bias)’에서 찾습니다. 나쁜 소식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해 온 인간의 본능은, 생존에는 유리했지만 평온한 삶에는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위험을 감지하고 대비함으로써 살아남았습니다. 동굴에 야생동물이 나타나는 것은 단 한 번이었지만, 그 가능성에 대비하지 않으면 삶 전체가 위태로웠기에 늘 긴장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는 맹수는 없고, 오히려 우리가 키워낸 과도한 욕망이 마음의 위협이 되어 돌아옵니다. 더 많이 갖고 싶고, 더 잘되고 싶고, 더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채워지기보다 늘 새로운 결핍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걱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니, 더 커져만 갑니다. 걱정은 어쩌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이루고 싶은 것이 많을수록' 그것이 좌절되거나 상실될까 하는 걱정 또한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지만, 만약 그 기도가 '나의 욕망'을 내어놓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강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걱정을 기도로 포장한, 걱정의 또 다른 얼굴일 뿐입니다.


기도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느님께 고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진정한 기도는 내 안의 ‘나’를 덜어내는 일입니다. 조성모의 노래 ‘가시나무’에는 “내 안에는 내가 너무 많아 당신의 쉴 곳이 없네”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으면서도 그분이 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내 마음이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그 가득 찬 마음을 비우는 시간입니다. 내가 너무 많으면 하느님이 계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려놓아야 합니다. 바람을, 욕망을, 심지어 기도의 응답까지도.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기도의 자세입니다.


그런 기도의 전형으로, 김교신 선생의 기도를 떠올립니다. 그는 “제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더욱 감사한 것은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은 것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을 때조차 감사할 수 있는 믿음, 그것은 하느님의 뜻 앞에서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겸손에서 나옵니다. 기도는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기도가 걱정을 없애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걱정을 없애기보다는, 걱정을 내려놓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내 안의 과도한 나를 덜어내고, 그 자리에 그분을 모시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때로 응답보다 침묵으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은 흘러가고 있고, 우리는 그 뜻에 순종할 때 비로소 걱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공평하게 엉망진창입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고, 내려놓고, 비워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는 무엇인가를 간절히 얻기 위한 간청이 아니라, ‘하느님이 들어올 자리를 만드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걱정할 이유가 사라졌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해야 할 기도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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